부모가 되기 전에 가장 걱정했던 부분 중 하나가 '내가 좋은 엄마가 될 자격이 있는가?'였다. 임신의 소식을 확인하던 순간의 기쁨과 함께 밀려온 것은 부모 자격에 대한 불안감이었고, 기쁨과 불안을 동시에 느끼는 혼동은 일상에서도 빈번했기에 역시 혼란스러웠다.
아이를 갖는다는 것의 감사함,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원하던 선물을 받았을 때의 충만감, 뭐라도 되는 것 같은 기쁨과 안심은 나나 남편의 임신 노력보다는 마치 신에게 허락받은 듯한 기분에 취하기도 했다.
아이는 하늘에서 주신다는 말 때문이지 않았을까?
그리고 초조하고 불안했던 마음을 살펴보면 내가 좋은 엄마가 될 자질, 남편이 좋은 아빠가 될 자질이 과연 있을까에 대한 의심에서 시작되었다. 둘 다 성장과정이 평탄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갈등과 불화, 원치 않는 이별의 경험으로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늘 긴장 상태에서 살아왔던 두 사람이었기에 아이에게 우리의 어린 시절이 대물림되면 어쩌나 하는 불안함. 책임에 대한 부담감이 컸다.
그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의심의 눈초리로만 보기에 내가 남자 고르는 눈이 없는가? 아니었다. 불운한 성장환경 속에서도 자기 주관과 소신이 분명하였고, 불의에 굽히지 않고, 손해를 보더라도 신념을 지킬 줄 아는 모습을 보면서 나를 배신하지 않을 것 같은 안심을 했다. 남편 역시 나를 보면서 자신과 비슷한 성장 과정에서 연민과 동정으로 시작했던 감정이 시간이 갈수록 뭔가 안정감과 편안함을 느끼게 되면서 배우자 감으로 선택했다고 한다. 한때 엄마가 자신을 따뜻하게 살펴봐 주고 기분을 알아주고, 고개를 끄덕여 주던 모습이 나에게서 투영된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남녀의 사랑에는 콩깍지가 끼여 부부까지 되는 게 아닐까?
아이를 갖게 되면서 밀려오는 불안감에 굳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배경이 어떻든 현재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그대로 수용하고 변화를 시도하는 모습이었기에 우리 부부에게 오는 아기가 우리의 과거를 대물림할 것에 대한 불안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임신이라는 사실 뒤에 기쁨과 감사함을 선택할지, 불안과 두려움을 선택할지는 오로지 나와 남편의 몫이었다. 우리는 불안과 두려움을 충분히 나눈 후 그저 감사하고 기뻐하기로 했다. 감사한 마음을 내는 순간 우리가 해야 될 것들이 보였다.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할지 진지하게 고민을 한 것이다. 결혼할 때 세운 가정에 대한 가치관에서 보다 더 현실적으로 아이를 키우면서 어떤 부모가 될지, 우리가 무엇을 가장 우선적으로 생각하면 좋을지를 진지하게 나누었다. 경제적인 목표, 각자의 커리어, 서로 협동할 부분, 아이에 대한 기대와 책임 등을 진지하게 나누면서.... 많이 싸웠다. 그 과정이 한 번에 정리되지 않는다. 태어난 아기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매 순간 부딪힌 것이다. 함께 긍정적인 합의를 도출했다고 하지만, 현실에 부대끼다 보면 내가 더 희생했네, 니가 더 쪼잔하네를 판가름하며 서로를 긁어대던 적도 여러 번이다.
다행히 우리 부부에게는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는 기술이 남아 있었다. 말로 안 되면 편지라도 써서 표현한다. 메일을 보내거나 손 편지로 마음을 전하고 답을 하는 과정에서 상대방보다는 자신의 마음 이야기를 했다. 솔직히 남편보다는 내가 그랬다. 이러한 마음을 전하면 남편은 멈추어 생각하는 듯했다. 그리고는 고심한 흔적의 답변이 돌아온다. 때로는 길게, 때로는 간단한 한 줄로, 때로는 전화 한 통으로 그렇게 돌아오면 우리는 다시 문제를 잘 해결하기 위해 서로 조율하는 과정을 거쳤다.
어느 날 남편에게 말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돈이나 빌딩을 물려주기에는 우리 형편도 너무 빤해.
내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그 곰곰이 생각하는 거 하지 말라니까!"
"아니 들어봐. 내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좋은 자산이 있더라고. 그걸 아이들에게 주는 게 어때?"
"그게 뭔데?"
"성찰하는 태도 말이야. 난 아무리 봐도 우리한테는 이 기능이 좀 탁월한 것 같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도 좋고, 자신을 충분히 돌아보고 받아들일 줄 아는 거 말이야. 난 이거 하나면 인생에서 치트키 얻는 거라고 보는데?"
".... 의외네.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지."
맞다. 사실 나도 갑자기 떠오른 말이었는데 남편의 마음을 움직인 것 같다. 이후 내가 하는 일에 전적으로 돕는 사람이 되면서 서로에게 좋은 역할이 되기 위해서 자신을 돌아봐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조금씩 배우고 실천하면서 지금까지 왔다.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면 아이가 줄거리는 물론 소감을 꼭 이야기하도록 했고,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할 때는 판단하려 들지 않았다. 이 부분이 생각보다 쉽게 적용될 수 있었던 부분은...
어려서부터 내가 그토록 하기 싫었던 '성찰해라. 반성해라. 자성해라.'라던 집안 분위기에서 온 것이다. 나는 그때 늘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말을 귀가 닳도록 들었고, 그 이유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다. 그러니 늘 거부하는 마음이 있었다. 고리타분한 고사성어, 유교중심의 문화, 억압적인 환경이라고 단정 짓기에 급급했다. 억지로 생각하는 척 머리를 굴려야 했고, 마음을 표현하도록 했었다. 그저 귀찮은 숙제 하듯 억지로 했다. 그런데 습관이 무섭다고 그 과정 덕분에 사고가 깊어지는 선물을 받은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 부분이 필요함을 알게 된 것은 아이를 키우면서였는데, 이때 스스로 발견한 것이 왜 성찰하고 반성하고 자성하라고 강조했는지에 대한 이유였다. 그 이유마저도 스스로 깨닫기를 바랐던 것 같은데... 반항심 있는 나에게는 성찰하라는 이유를 찾기보다는 거부하는 마음에서 성찰을 습관적으로 하다 보니 오히려 내가 정신병자인가. 속으로는 온갖 부정적인 말을 다 하고 싶지만, 겉으로는 뭔가 잘 이해하고 깨달은 것처럼 말하면서 나 자신과 동떨어 지는 기분이었다. 입만 번지르르 하고 마음은 병드는 것 같았다. 강요된 성찰 나에게 지옥 이었다. 때문에 반항심과 저항감이 세졌다.
큰 아이가 아주 어릴 때 내가 '니 생각은 어때?', '그건 왜 그렇게 생각했어?'라고 물으니 아이가 멈칫 한다. 아무래도 잘못한 행동 때문에 내가 혼낼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때 번뜩하고 지나간 것이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이다. 성찰하라던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혼나는 기분이었다. 사실 혼난 적이 없는데도 분위기상 혼 날 것 같은 감정 때문에 불안했던 것이다. '이건 너를 혼내려고 하는 게 아니라, 엄마가 OO이가 말해주지 않으면 엄마 마음대로 생각해야 되니까.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라고 하면 아이는 자기의 행동에 대해 설명했고, 스스로 자기가 잘 못하거나 실수한 부분이 발견되면 '아! 다음에는 이렇게 하면 되겠다!'라고 했다. 이후엔 당연히 그 행동이 달라졌다. '다음에 이렇게 해라!'라고 하지 않아도 스스로 그 이유를 찾아서 변화시키는 아이를 보면서 '내가 어렸을 때 왜 그렇게 내 생각을 말하라고 할 때마다 답답해하고 거부하감이 일어났는지 알게 되었다. '성찰해라.'는 이유를 알지 못한 채 불안한 내 감정에만 압도 된 것이다. 다시 돌아가도 10대에는 그 이유를 충분히 알아낼 수 없을 것 같다. 그저 나이 많은 어른이 나한테 예의나 가리키고 나를 틀에 가둬서 키우려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내 수준일테니.
자녀를 성인기로 키워놓고 보니 우리 부부는 물질이라는 자산을 물려주는 데에는 여전히 갈 길이 멀다. 물가는 점점 치솟고, 경쟁 구도의 사회는 더욱 양극화가 심해진다. 여기저기 우울과 불안으로 병들어 가는 사람들이 많고 자신을 믿지 못해 삶을 포기하려는 사람들이 군중 속에 투명인간처럼 살아가고 있다. 그 속에서 우리의 경제환경이 급변화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부족하지 않게 키우려 했고, 각자의 역할을 잘 소화하려 했고, 위기에는 함께 방법을 찾으면서 20년 이상을 살아오니 성찰하는 태도를 자산으로 물려 주자고 들떠서 이야기 하던 20대의 내가 탁월한 선택을 한 것 같다.
지금도 내 아이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어떤 사람으로 존재하면 좋을까를 고민하면, 딱 하나! 주관과 소신이 분명한 사람이 되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성찰 기능을 키워 주는 것이 최선이라고 본 20대의 내 발견에 이제와 박수를 보낸다.
성찰은 사전적으로 '자기의 마음을 반성하고 살핌'이라는 뜻이다. 나는 이 사전적 의미보다 내가 정의한 '스스로를 바라보는 힘'이라는 것이 더 와닿는다. 스스로 바라보고 깨달아 가는 과정이 결국 '삶' 아닐까 싶다. 인간의 몸을 입고 살아가는 한정적인 시간 속에서 꼭 해야 되는 것이 있다면 '외적인 나는 물론 내적인 나를 만나기'가 아닐까 싶다.
아이를 낳기 두려워하는 엄마나 아빠들이 어린시절 삶에 대한 투영에서 비롯된 불안과 두려움이 원인이라면 지금부터라도 자신을 성찰하고, 과거에 머물러 후회나 원망, 자책을 하기보다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자신을 힘껏 안아주어 스스로를 일으켜 주면 좋겠다.명심할 것은 이 세상의 어떤 현상에도 두 가지가 늘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 두 가지 중에서 무엇을 선택할지에 대한 선택권은 자신에게 있음을 믿고 자신에게 유리한 선택을 해서 보다 편안한 삶을 기대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