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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림 Jan 05. 2021

커피 한 모금이 주는 여유

"엄마, 커피는 맛있어?"

8살 아이의 질문. 아이가 즐겨보는 TV 프로그램의 주제가 '카페인'이었던 날이었다. 커피를 내 기준에서 맛있다고 해야 하나, 아이의 기준에서 맛없다고 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맛있다고 하면 먹어보고 싶다고 할 것 같았고, 그걸 말리려면 피곤하겠다 싶은 생각이 들어 대답을 결정했다.

"아니, 맛없어. 커피는 아~~주 쓴 맛이야."

"맛없는데 왜 먹어?"

어라. 이유를 물을 줄이야. 왜 먹지? '늘 정신이 나간 상태니까 정신 차리려고 먹는다', '잠이 오니까 먹는다', '습관이라 먹는다' 등등, 무엇이 커피를 들이붓는 이유가 될까?

"어른들은 늘 피곤하거든. 할 일도 많고 생각할 것도 많고. 너무너무 피곤하니까 힘을 내려고 마시는 거야."

괜찮은 대답이라 생각했지만, 아이는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엄마, 내가 잘 때 같이 자면 되잖아. 밤에 안 자고 만날 혼자 나가서 텔레비전 보고 하니까 피곤하지.”

앗.... 알고 있었니. 너 잠들기만 기다리는 거.. 눈치챘니. 정말, 말문이 막혔다.






나는 언제부터 커피를 마셨더라 생각하다보니, 커피를 참 자주 드셨던 돌아가신 어머니가 떠올랐다. 식후엔 물론이고 간식시간에도 늘 커피가 함께였다. 호로록 호로록 자주 커피를 드시던 어머니는, 어느 순간부터 나에게 커피 '제조' 심부름을 시키셨다. 커피잔을 꺼내 커피 2숟가락, 프리마 2숟가락, 설탕 2숟가락을 넣어 두면, 어머니가 팔팔 물을 끓인 주전자를 들고 다가오셔서 컵 안으로 물을 쪼르르 부으셨다. 살살 저은 후 첫 모금을 마신 어머니가 '아, 맛있다' 하면 칭찬을 받은 듯 기분이 좋았다. 맛있다는 그 맛이 궁금한 것은 당연했다.

"커피는 무슨 맛이야? 먹어보고 싶어."


참 오래도 조르고 졸랐던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 5~6학년 무렵이었을까. 당시 '몰빵'으로 급성장을 해버린 나는 어머니와 거의 비슷한 높이로 자랐다. 그 무렵 어느 날, 커피 2숟가락 프리마 2숟가락 설탕 2숟가락을 컵에 넣고 있는데 어머니가 그 옆으로 컵 하나를 더 놓으셨다. 그리고는 무려 '투게더' 아이스크림을 큼지막하게 2숟가락을 떠서 컵 안에 넣으셨다. 그리고 또 컵 하나를 꺼내 커피 진짜 조금, 프리마 진짜 조금, 설탕 진짜 조금을 넣고 뜨거운 물을 쪼~~ 끔 부어 그것들을 녹이시고는, 아이스크림이 들어있는 컵 안으로 휘익 부어주셨다. 새하얀 투게더 위로 흐르는 커피 액체는, 하얀 눈밭에 용암이 흐르는 듯 아름다워 보였다. 커피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아이스크림들이 녹아내렸다. "와-"하며 감탄을 할 수밖에 없는 광경. 커피가 '스쳐 지나간' 그 아이스크림을 숟가락으로 듬뿍 떠 입 안에 넣으면, '달콤 쌉싸래' 한 맛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어른의 맛은 이런 것이구나. 달콤 쌉싸래. 내 인생 첫 커피였다.


이후로 성장기에 커피를 가끔씩은 마셨지만, 아주 '쏟아붓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1학년부터였다. 어머니가 암 선고를 받으시고 입원을 하신 즈음부터였을까. 정말 '미친 듯' 잠이 쏟아졌다. 늘 언제나 계속 꾸준히 미친 듯이 졸렸다. 한참이 지나 기면증이라는 병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이 무렵이 문득 떠올랐을 만큼 정말 도저히 잠을 참을 수가 없던 시기였다. 수업시간에 엎어져 자는 것은 일상이었고, 버스에서도 기절하듯 잠이 들어 내릴 곳을 지나친 적도 많았다. 집에 와서 정신을 차려 보면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로, 침대 옆(침대까지 가서 눕지도 못한 채) 바닥에 쪼그려 잠들어 있는 경우도 많았다. "클려고 그러나 보다" 할머니는 말씀하셨지만, 초등학교 때의 몰빵 성장이 내 인생 '마지막' 성장기였다. 어쨌든 그 무렵부터 잠들지 않기 위해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한 캔 두 캔, 커피양은 점점 늘어갔다. 입에 달고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각성 효과는 전혀 없었다.


입사 후에도 커피 사랑은 이어졌다. 노란 믹스 봉지를 툭 뜯어 컵으로 털어 넣고 뜨거운 물을 부어 마셔댔다. 신입사원 시절, 커피가 가득 든 머그잔을 들고 탕비실을 나와 사무실 자리로 가서 앉으면 '찐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뜨거운 커피를 후후 불며 눈은 컴퓨터 화면에서 떼지 못하는, '이런 프로 직장인 같으니!'하며 커피를 마시기도 했다.

이제 직장생활 13년 차. 그런 새삼스러움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 눈 뜨면 마시고 졸리면 마시고 생각나면 그저 마실 뿐이다. 직장에서든 집에서든 어른의 삶은 정말 만만치 않았고, 그저 습관처럼 커피를 삼켜댔다. 어른의 맛? '달콤'은 온데간데 없고 그저 쌉싸래했다. 입 안 가득 씁쓸함이 퍼지는 쓰고 쓰고 쓴 맛.  






학교도 학원도 문을 닫은, 갈 곳 없는 주말의 어느 날. 보드게임도 했고 엉망인 집을 정리했고 밥도 차려줬지만 하루가 아직 절반이나 남은 그런 날이었다. 잠을 설쳐 피곤했고 아이의 밑도끝도 없는 상상놀이에 영혼없는 대답을 하며 시간을 흘려 보내고 있었다. 커피 생각이 간절해져 방에서 혼자 놀이에 빠져드는 아이를 보며 슬며시 일어나 부엌으로 왔다. 커피를 컵 가득 따라 막 입에 댄 그 순간. 

"엄마, 커피는 무슨 맛이야?" 아이가 슬며시 부엌으로 와서 물었다.  

저 질문에 대답하면 기승전을 거쳐 또 끝없는 게임 이야기에 귀를 바쳐야 할 것 같았다. 이기적인 엄마라 미안하지만, 따뜻한 내 커피를 너무나 지켜내고 싶었다. 이럴 때는, 먼저 선수를 쳐야 했다.

"아들, 심심하지?"

"응."

"오늘 패드 한 번도 안 했으니까 지금부터 좀 할까? 엄마는 잠시 쉬고 있을게."

"오-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가는 아이를 보며, 어머니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어머니도 쉬고 싶을 때 커피를 마셨던 거구나, 문득 깨닫게 됐다. 쌉싸래한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고 '아, 맛있다' 감탄사를 말하며 이런저런 고민들을 잠시 잊어버리는 찰라의 순간. 잠깐이라도 일상을 내려놓고 싶어서 그렇게나 자주 커피를 마셨던 거였구나, 생각하게 됐다.

진짜 어머니의 마음을 알 길은 없지만, 드디어 조용해진 부엌에 앉아 커피 한 잔을 비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10분만 조용히 멈추자. 커피를 또 한 모금 마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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