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오빠와 나는 원수였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한 집에서 만나버린, 두 살 터울 오빠는 정말 미웠다. 초등학생 시절 오빠에게 수학을 배운 후, 나는 차라리 '수포자'(수학포기자)가 되기를 택했다. "이게 정말 이해가 안돼?", "바보냐?", "넌 안되겠다" 등의 모진 말폭탄 속에서, 나는 이 인간과 한 집에 살아야 하는 스스로를 가엾게 여겼다. 그런 남매였다. 중고등학생 시절 길에서 마주치면 모른 척 서로를 스쳐 지나갔다. 함께 있던 친구들이 "너희 오빠 아니야?"하면 "모르는 사람인데"하며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살 좀 빼라", "못 생겼다" 등은 학창시절 오빠의 단골 레퍼토리였다. 바짝 약이 올라 "거울이나 봐", "너는 잘 생겼냐" 하며 싸워댔다. 부모님은, 아니 신(神)은 왜 나에게 저런 것을 오빠라고 준 것인가 원망했다.
오빠가 고3, 내가 고1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1~2월에 병을 알고 7월에 떠나셨으니 지금 돌아봐도 참 짧은 기간이었다. 오빠는 공부를 꽤나 잘했기에 온 가족은 그의 성적을 지켜주고 싶어했고, 합심하여 어머니의 병세를 오빠에겐 자세히 알리지 않았다. 나에게도 여러 번 신신당부했기에 어른들의 말을 따랐다. 모두의 기대와는 달리 어머니는 그해를 넘기지 못했고, 고3 오빠는 수험생 시기 한 중간에 어머니의 장례를 치렀다. 모두가 예상했듯 오빠는 수능을 망쳤다. SKY에 들어간다던 오빠는 지방대에 안착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그해, 7월 이후의 일들은 기억에 남아있는 것이 별로 없다. 한참이 지나 이야기를 하다가 오빠 역시 그랬다는 것을 알았다. 고3도 고1도 학교에는 다녔지만, 다니지 않은 것과 비슷한 상태였다. 몸은 학교에 가서 앉아 있었지만 정신은 학교도 집도 아닌 어딘가를 정처없이 떠다녔던 것 같다.
2년 후, 공부를 그럭저럭만 했던 나 역시 오빠와 같은 학교에 입학했다. 대학교 1학년 여동생과 입대를 앞둔 3학년 오빠는 함께 열심히 술을 마셨다. 학교에서 만나면 “yo, sis”, “yep, bro” 하며 친한 척을 했다. 서로의 친구들과도 어울렸다. 오빠가 추천해주는 영화와 책을 보며 20살이 된 나는, 내가 찾아낸 세계를 오빠에게 추천하며 평가받고 싶어했다. 그렇게 은희경,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류 등에 빠져 경쟁하듯 책을 읽고, 술을 마셨다. 급하게 모은 지식을 서로 뽐냈다. "캬, 진짜 멋지지 않냐" 오빠가 말하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주억주억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면서 더 친해져 버렸다.
그리고 오빠의 입대. 오빠가 군대로 떠나고 나는 며칠간 식음을 전폐하고 울어댔다. 팅팅 부은 눈으로 아르바이트를 갔더니 사장님이 “뭔 일 있어?” 하고 물으셨고, “ㅇ....오빠가 군대에 갔어요” 라며 훌쩍였다. “남자친구 없다 그랬지 않나?” 사장님이 물으셨다. “없어요. 저희 친오빠가 군대에... 엉엉.”
"거 참, 사이좋은 남매네" 하며 사장님은 의아해했다. 나도 의아했다. 오빠 얘가 뭐라고 내가 이렇게까지 슬퍼해야 하나 싶었지만, 터져나오는 눈물을 어떻게 잠가야 할 지 방법을 몰랐다. 갑작스런 오빠의 부재는 어쨌든 큰 상실이었고 단절이었다. 내가 오빠에게 많은 부분 의지하고 있음을 그 때 처음 알았다. 철없는 동생같은 오빠였는데, 그 부재가 내게 미치는 영향력이 꽤 커서 스스로도 놀랐다. 오빠가 군대에 있을 이 무렵, 아버지는 알코올중독으로 입원했다. 20살, 오빠도 아버지도 없었지만 혼자 씩씩하게 지냈다. 오빠도 아버지도 곧 돌아올 거니까 하고 생각은 했지만, 뭘 해도 참 쓸쓸했던 시기였다.
2018년, 아버지가 누워 계신 응급실 침대 옆에 오빠와 나는 덩그러니 서 있었다. 아버지는 의식이 없었고 호흡이 불규칙했다. 응급실 의사와 간호사들은 놀랍도록 무심했다. 내가 흥분해서 "아니, 저기요!" 외치고 다니면, 오빠가 그냥 있으라며 말렸다. 그리곤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한참 후 의사와 함께 돌아왔다. 오빠가 있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이날 처음으로 했다.
응급실에서 일반 병실로 아버지를 옮기고 우리 남매는 안도했다. 주무시는 아버지 곁에서 호흡이 안정적이다 같은 말을 하며 "누가 먼저 밥 먹으러 갈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순간, 기계에서 삐- 경고음이 울렸다. 간호사가 달려와 침대째로 아버지를 밀고 어느 방으로 사라졌고 따라 들어가려는 우리를 막아섰다. 의사들이 뛰어 들어가고 잠시 후 간호사가 나오더니 "보호자분들은 어디 가지 말고 여기 계세요" 하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병원 복도는 참 조용했고, 아버지가 처하신 응급상황은 복도에서도 다 들렸다. 그 방으로 들어가지도, 다른 곳으로 도망치지도 못하는 상태로 시간이 흘렀다. 중환자실이 어쩌고 연명치료가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줄줄줄 읊어대는 의사를 바라보는 그 상황에서도 오빠는 옆에 있었다. 오빠가 모든 결정들을 했고, 나는 고갯짓만 겨우 했다. 소리를 내면 눈물이 날까봐 목구멍에 힘을 잔뜩 주고 있었기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 응급상황은 꽤나 길었다. 아버지의 호흡이 다시 안정적으로 돌아오기까지 2시간 여.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그저 복도벽에 기대어 있었다. 곁엔 아무도 없었다. 오빠와 나 뿐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똑바로 마주보지도 않았다. 누군가는 바닥을 보고, 다른 누군가는 빈 벽을 노려본 채 말없이 서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었다. "내가 여기서 울면, 옆 사람도 무너진다" 그 마음을 텔레파시처럼 함께 붙잡고 있었다.
입 밖으로 나오려는 울음을 간신히 삼킬 수 있었던 것은, 오빠의 눈물만은 그 순간 보고 싶지 않아서였다. 오빠가 울면, 모든 것이 끝나버릴 것 같았다. 쪼그려 앉았다가 머리를 벽에 기댔다가 하면서 의사들을 기다렸다. 조금은 안정됐다는 의사의 말에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스르르 기대어 앉았다. 그런 내 어깨를 오빠가 툭툭 치며 말했다.
"담배 한 대 피고 올게."
혼자 있기가 무서워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싶었지만, 어른스럽게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었다. 오빠가 비운 5분. 나는 그 5분 동안 벌벌 떨었다. 혹시나 오빠가 없는 이 틈에 "지금이다!" 하며 어떤 나쁜 일이 벌어질까봐 무서웠다. 기다림의 시간이 지나고 복도 끝에서 오빠가 나타났을 때는 자체후광이 보일 정도였다. 진심으로 달려가 안을 뻔 했다. 이쯤 되니 용기를 갖고 말해야 할 것 같았다.
"오빠가 있어서 좀 다행인 것 같다."
"그래, 나도. 혼자 있는 것보단 낫네."
허공 어딘가를 바라보며 공기에 대고 툭- 툭 내뱉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알았다. 같은 마음인 것을.
2020년 아버지 장례식장. 38살까지 나이를 먹었음에도 나는 반쯤 정신을 놓고 있었다. 장례식장 관계자가 상주냐 물으면 "네" 하고 대답은 했지만, 상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네? 네?"하고 되묻고 있을 때마다 40살 오빠가 나타나 이런저런 일들을 처리했다. 그리고 나가려는 장례식장 관계자를 다시 불러 말했다. 턱으로 나를 가리키며 "얘가 정신이 없으니까 저한테 얘기하세요" 했다. 졸지에 정신없는 사람이 된 나는 멍하니 오빠 등을 바라봤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안 계시니, '찐'가족은 저 인간밖에 남지 않았군 하며 오빠 등을 바라봤다. 새삼 참, 어깨가 무거워 보였다.
요즘, 나는 가끔 두렵다. 술을 자주 마시는 오빠에게 무슨 나쁜 일이 생기면 어쩌지, 하는 밑도 끝도 없는 두려움을 간혹 느낀다. 오빠마저 없다면, 지금의 나는 더이상은 버틸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불쑥 올라오곤 한다. 그런 날은 오빠에게 전화를 걸어 대뜸 “밥은?” 하고 물어본다. 몇시든 상관없다. 그냥 그렇게 묻는다. 그리고는 쓸데 없는 이야기를 잔뜩 하며 깔깔 대다가 전화를 끊을 때쯤 슬그머니 하고 싶은 이야기를 덧붙인다.
“술 좀 고만 마시지? 그러다 아빠처럼 된다?”
아버지의 아들, 아버지의 다정하고 다정한 혀를 물려받은 오빠가 다정하게 대답한다.
“니나 작작 처 마셔라. 이 가시나야.”
“........”
딱 이만큼만. 이 정도로만 서로에게 별일 없이 늙어갔으면 좋겠다. 부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