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직한 지 2년이 지났다. 바꿔 말해, 거의 매일 운전을 해서 출퇴근을 한 지 2년이 지났다는 얘기다. 2년은 물론 긴 시간이다. 지리멸렬했던 이혼소송도 끝이 났고, 아이는 무려 11살이 되었고, 내 나이는 나라에서 1살을 깎아줘도 마흔이 넘었다. 그럼에도 변함없이 한결같이 꾸준하게, 운전이 어렵다.
초보운전 스티커도 여전히 붙이고 있다. 초보운전 스티커를 붙여두면 다른 차들이 무시해서 오히려 더 위험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내가 이상한 일을 벌였을 때 초보라는 핑계라도 대고 싶어서 떼고 싶지가 않다. 주차를 한 번에 해내지 못해 차를 넣었다뺐다 난리를 치는 순간이나 내비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 버벅이는 순간 등, 나 때문에 화를 내고 싶은 누군가가 초보운전 스티커를 보고 아예 피해가기를 소망하는 거다. '어우, 초보네. 나도 초보 때는 저랬지' 하는 누군가가 1명이라도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랄까.
올 여름에도 차를 참 많이 긁었다. 땡볕을 피해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길이 늘 문제였다. 왼쪽 공간이 충분하다 싶으면 오른쪽 엉덩이가 긁혔고, 오른쪽에 공간을 더 두려 하면 왼쪽 머리가 긁혔다. 수많은 긁힘들. 하얀 차의 오른쪽 엉덩이와 왼쪽 머리는 노오랗게 변해가고 있다. 복권도 아닌 것을 왜 그렇게 긁느냐고 누군가는 말했고, 회사 주차장 입구는 넓은 편인데 다른 주차장엔 대체 어떻게 가느냐고 누군가는 물었다. 굳이 대답하자면, 다른 '지하' 주차장엔 여태 가 본 적이 없다. 2년을 다닌 회사 주차장에서 최근까지 차를 긁었는데, 다른 지하에서 또 무슨 짓을 벌일지 겁이 나서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자전거를 못 탄다고 했을 때 사람들이 했던 말이 어쩌면 맞는지도 모르겠다.
“넘어질 걸 무서워하면 평생 못 타.”
넘어지는 건 무섭지 않은데, 내가 남에게 피해를 주는 건 무섭다. 지하주차장으로 가는 길에서 오도가도 못하게 되어버린다거나 주차를 빠르게 하지 못해 통행에 방해가 된다거나 하는 일들. 그런 순간을 맞이하게 될까봐 겁을 먹다보니, '일단 한 번 가보지 뭐' 하는 식의 행동을 좀처럼 하지 않게 된다.
성격이란 그런 것이다. 동일한 상황이 펼쳐져도 사람마다 제각각 다른 결과가 나오게 만드는 신비의 영역. MBTI를 신뢰할 수 있는 척도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내 결괏값은 INTJ였고 INTJ가 가장 싫어하는 게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라는 글을 보곤 엄청나게 공감했었다. 이 세상의 많고 많은 사람들이 모두 다르고, 내 성격이 운전에 적합한 것은 분명 아닌 듯하다.
아이를 키우면서 나는 늘 생각했다. "이 힘든 걸, 이 모든 사람들이 다 해냈다고? 엄청나다."
운전을 하면서도 늘 생각한다. "이 힘든 걸, 길 위의 모든 운전자들이 쉽게 해내는 거야? 엄청나다."
그래, 어쩌면 육아도 운전도 내 성격에 맞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남한테 피해를 주는 게 가장 싫고, 혼자 있는 시간이 확보되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니까. 그러고보면 운전은, 몸치니 뭐니 하는 문제보다 성격과 더 관련 있는 영역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2년째, 매일 같은 차선에 차를 놓고 출퇴근을 하고 있다. 옆차선이 아무리 뻥뻥 뚫려 있다 한들, 굳이 그리로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뭐하러. 지금 왼쪽으로 가봤자 나~중에 우회전 할 때 또 바꿔야 하잖아. 여기도 곧 뚫릴 거야. 그 생각을 2년째 변함없이 하고 있다. 웬만하면 하던 대로, 웬만하면 살던 대로 사는 게 편한 이 성격.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생각은 한다. '돌아다니길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여기저기 다니면서 운전에 더 익숙해졌겠지? 나도 더 다니면 운전을 더 잘할 수 있게 될 거야.'
그럼에도 아이가 집에 없는 자유시간이 되면 역시나 익숙한 선택을 하게 된다. 약속이 없다면 집에 있는 게 가장 좋으니 가만히 머물게 되고, 마구 나가고 싶은 날 약속을 잡아 나간다한들 대부분이 술약속이니 차를 두고 움직이게 되고. 운전이 늘지 않는다고 푸념하기엔, 내 성격이 좀처럼 바뀌지 않는 게 더 큰 문제같기도 하다.
"운전 쉽잖아."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신기하다. 뭐하나 쉬운 구석이 없는데. 주행이든 주차든 차를 몰고 움직인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 어째서 쉽다고 말을 하는 걸까.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운전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나에게 "좀 지나면 나아지겠지"하고 말을 했지만, 2년이 지나도 좀처럼 나아지진 않았다. 옛 어른들의 말씀이 떠오른다. 사람이 변하면 죽을 때가 된 거라고 하셨던가. 후훗. 이토록 한결같은 나는 아직 죽을 때는 되지 않은 것 같다.
이렇게나 스트레스를 받음에도 계속 운전대를 잡는 이유는 뭘까. 이상한 얘기일 수 있지만, 나는 운전을 할 수 있는 내 모습이 좋다. 운전 그 자체는 아직도 좋아하기 어렵지만, 그걸 조금이라도 해내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이 마음에 든달까. '미숙하지만 할 수 있다'와 '아예 못 한다'는 완전히 다른 문장이기 때문에. '미숙하지만 할 수 있는' 내 모습이 좋다.
그리고 그 할 수 있음이 내 선택지를 넓혀 주는 게 참 좋다. 대중교통을 이용해야만 했을 때는 내 시간과 공간을 대중교통에 맞춰야 했다. 대중교통이 닿으면 갈 수 있는 곳, 안 닿으면 못 가는 곳. 대중교통이 빨리 끊기는 곳이면 더 머물고 싶은 마음과 상관없이 움직여야 했었다.
지금은? '대중교통 안 되면 운전하면 되지'하고 생각할 수 있게 됐다. 대중교통이라는 선택지만 있을 때는 고민할 여지도 없이 대중교통에 나를 맞춰야 했지만, 지금은 둘 중 하나를 고를 수 있는 입장이 된 거다. 짐이 많은데 운전해서 갈까? 기차역에서 별로 안 먼데 기차를 탈까?
선택지가 넓어졌다는 건, 내가 선택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내가 원하는 때에, 내가 원하는 곳에,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갈 수 있다는 것. 내가 닿을 수 있는 시공간이 넓어진 게 참 마음에 든다. 집순이 주제에 대체 언제 나갈 거냐고? 언젠가 내가 원할 때 나가게 되지 않을까. 말했듯, 나는 이제 '미숙하지만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넓고 넓은 세상, 그곳에 닿을 수 있는 수단이 하나 더 생겼고, 그걸 내가 해낼 수 있다는 게 역시나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