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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의 기술(The Art of Space)

심리를 움직이는 동선(動線)의 힘

by 성민기

우리는 쇼핑을 할 때 목적에 맞는 상품을 산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은 공간이 설계한 길을 따라 시선을 빼앗긴 채 멈춰 서 있을지도 모른다. 매장 안에서 고객이 어느 길로 들어서고, 무엇을 보고, 어디에 머무르는가는 철저히 계산된 결과다. 이것이 바로 공간의 기술의 시작이다.


카지노 : 시간을 지우는 공간

그 전형적인 예가 카지노다.

카지노에는 세 가지가 없다. 바로 창문, 시계, 출구다.

고객은 언제 들어왔는지, 얼마나 머물렀는지 잊게 된다. 게다가 무료 음료와 화려한 조명은 체류 시간을 더욱 늘리며 지갑을 열게 한다. 즉, 공간 자체가 고객의 인지와 행동을 통제하는 것이다.

이는 환경심리학(environmental psychology)에서 말하는 자극(Stimulus)–유기체(Organism)–반응(Response). 즉, S-O-R 모델과 일치한다. 이 모델은 소비자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한 이론적 근거로 많이 사용된다.

이 이론은 환경적 자극(공간)이 고객의 감정·태도(유기체)를 바꾸고, 그 결과 행동(구매)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Mehrabian & Russell, 1974).

이처럼, 카지노는 ‘공간이 인간 행동을 결정짓는다’는 대표적 사례다.


대형마트 : 입구와 출구의 비밀

대형마트는 입구에서부터 동선을 설계한다.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신선식품은 ‘장보기의 첫 단추’를 채우게 하고, 출구 근처 계산대에는 껌, 초콜릿, 음료수가 놓여 있다. 잠깐의 기다림 동안 고객의 손은 자연스레 상품으로 향한다.

이는 Kotler(1973)가 정의한 Atmospherics(분위기 ) 마케팅 개념과 일치한다.

즉, 매장 환경을 감각적으로 설계해 고객의 심리에 영향을 주고, 구매 행동을 유도하는 전략이다.

Kotler는 이 개념을 시각(조명·색상·진열), 청각(음악), 후각(향기), 촉각(온도·촉감)으로 구분했다.

시각(Visual) → 조명, 색상, 레이아웃, 상품 진열 예: 마트 입구에서 밝고 신선한 채소 코너를 먼저 보게 하는 것
청각(Aural) → 음악, 소리 예: 느린 음악은 체류 시간을 늘리고, 빠른 음악은 회전율을 높임
후각(Olfactory) → 향기, 냄새 예: 베이커리 코너의 빵 냄새가 구매 욕구를 자극
촉각(Tactile) → 온도, 촉감 예: 따뜻한 조명과 쾌적한 온도가 머무는 시간을 늘림

이 모든 전략은 바로 분위기(Atmospherics) 마케팅의 전형적 적용이다. 이는 앞서 <오감의 힘>에서 다룬 개념과 일치한다.


다이소 : 위로 확장된 동선

다이소는 최근 단층 매장을 넘어 2층, 3층까지 확장하고 있다. 층별로 주방용품, 인테리어, 계절상품을 나눠 배치해 고객이 ‘탐험’하듯 오르내리게 만든다.
가격은 여전히 1천 원부터 시작하지만, 동선이 길어질수록 장바구니는 무거워진다.
이는 Underhill(1999)이 <Why We Buy>에서 제시한 원리와도 맞닿아 있다. 고객은 매장 동선을 따라 움직이며, 동선이 길어질수록 구매 기회가 늘어난다.

다이소는 “동선 = 매출”이라는 공식을 가장 잘 보여준다.


백화점 : 층별 배치의 전략

백화점은 고객의 연령과 소비 목적에 맞게 층을 구분한다. 지하 1층 식품관은 누구나 들르게 하고, 중간층은 젊은 층을 겨냥한 패션 브랜드로 채운다. 상층에는 레스토랑과 문화센터를 배치해 장시간 머무는 고객을 공략한다.
이렇게 층마다 다른 ‘공간의 맥락’을 주는 것이 곧 매출을 극대화하는 전략이다.


홈쇼핑에서의 심리적 동선

매장 안에서 고객은 발걸음을 옮기며 동선을 만든다. 하지만 TV 앞에 앉아 있는 홈쇼핑 고객도 사실은 심리적 동선을 따라 움직이고 있다. 리모컨을 손에 쥔 채 채널을 넘기며 이리저리 ‘재핑(zapping)’하는 행동이 바로 그것이다.

재핑은 단순한 채널 이동이 아니라, 고객의 마음이 이동하는 길이다. 몇 초 안에 시선을 붙잡지 못하면 고객은 곧장 다른 채널로 발걸음을 옮겨 버린다. 오프라인 매장에서 동선을 설계해 발걸음을 붙잡듯, 홈쇼핑에서는 첫 몇 초의 멘트, 화면 연출, 상품 디스플레이가 고객의 심리적 동선을 머물게 한다.

이때 중요한 것이 바로 시선 경제(attention economy)다. 디지털 시대의 고객은 주의력이 단편화되어 있기 때문에, 짧은 순간 안에 얼마나 강렬하게 시선을 사로잡느냐가 구매 여부를 좌우한다(Davenport & Beck, 2001). 또한 시청자가 진행자와 맺는 유사사회적 상호작용(Parasocial Interaction)은 채널 체류 시간을 늘리고, 결국 구매 전환율로 이어진다(Rubin, Perse, & Powell, 1985).

그래서 각 홈쇼핑사들은 공중파 사이에 근접한 자리에 채널을 배치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과 막대한 자금을 투자한다. 이는 단순한 물리적 배치 전략이 아니라, 심리적 동선의 관문을 선점하려는 경쟁이다.


공간은 길을 만들고, 길은 구매를 만든다

시간은 순간을 사게 만든다.
반면 공간은 고객의 시선과 동선 자체를 설계해 구매를 만든다.
카지노에서 길을 잃고, 홈쇼핑 화면 속에서 시선을 뗄 수 없고 마트와 다이소에서 동선을 따라가며, 백화점에서 층을 오르는 동안 우리는 상품을 사는 것이 아니라, 공간이 설계한 길을 따라 움직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공간의 동선이 바뀌면,
선택이 달라진다.

참고문헌

Bitner, M. J. (1992). Servicescapes: The impact of physical surroundings on customers and employees. Journal of Marketing, 56(2), 57–71.

Kotler, P. (1973). Atmospherics as a marketing tool. Journal of Retailing, 49(4), 48–64.

Turley, L. W., & Milliman, R. E. (2000). Atmospheric effects on shopping behavior: A review of the experimental evidence. Journal of Business Research, 49(2), 193–211.

Mehrabian, A., & Russell, J. A. (1974). An Approach to Environmental Psychology. MIT Press.

Underhill, P. (1999). Why We Buy: The Science of Shopping. Simon & Schuster.

Davenport, T. H., & Beck, J. C. (2001). The Attention Economy: Understanding the New Currency of Business. Harvard Business School Press.

Rubin, A. M., Perse, E. M., & Powell, R. A. (1985). Loneliness, parasocial interaction, and local television news viewing. Human Communication Research, 12(2), 155–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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