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박 7일짜리 제주 워케이션: 두 번째 일기
어느 날 갑자기 회사에서 워케이션을 보냈다(이전 글)와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오후 11시 30분
숙소에 도착했다. 6시 퇴근 후 2호선과 9호선 지옥철을 뚫고 안전히 김포공항에 도착했지만, 하필 내가 타는 항공편만 출발이 지연되는 바람에 1시간이나 늦게 숙소에 들어왔다. 다행히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숙소 컨디션은 꽤 좋았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건물을 지었던 곳에서 지어서 그런지 많은 부분이 비슷했는데, 유일하게 다른 점은 보일러로 온수를 따로 켜야 했다는 것. 이것도 모르고 곧장 샤워하러 들어갔다가 군 복무 이후 오랜만에 찬물 샤워를 즐겼다. (물기를 닦고 다시 나와 보일러 켜는 게 귀찮았다.) 얼른 캐리어를 열고 짐을 정리한 후 편의점에서 사 온 과자와 맥주 한 캔을 마셨다. 한 거라곤 공항에서 계속 대기만 했을 뿐인데, 왜 이렇게 지쳤을까. 내일 당장 일을 해야 하니 곧바로 잠을 청했다.
오전 7시 30분
기상 알람은 7시에 울렸지만, "Siri야, 30분 타이머."를 말하고 늦잠을 잤다. 잠자리를 가리는 편이 아니어서 생각보다 개운한 아침이었다. 조깅하러 나갈까 몇 번이나 고민했지만, 그냥 바닥 청소를 하는 것으로 제주의 첫 아침을 맞이하기로 했다. 정전기 청소포로 방을 박박 닦고 양치까지 했더니 마지막 잠도 달아났다. 잠깐, 이 정도 맑은 정신이면 조깅해도 되겠는데? 카카오맵을 켜고 바닷가로 갈 수 있는 러닝 루트를 탐색한 후 숙소를 나왔다.
오전 7시 50분
제주는 바람이 많이 불었다. 기온은 그닥 낮지 않았지만, 바람으로 인한 체감 온도는 확실히 무시할 수 없었다. 단단히 무장한다며 러닝 장갑까지 들고나왔지만, 막상 껴보니 장갑까지는 오바인 날씨. 시간이 아까워 준비 운동 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큰길로 나와 용두암 오른편에 있는 바닷가까지는 2km. 평소 시티런을 즐겨하던 나는 달리면서 주변 지리를 탐색하는 습관이 생겼는데, 낯선 곳에서 시티런을 하는 건 이 부분에서 매우 색다른 경험이었다. 자매국수 본점이 여기구나. 우진해장국은 맛집인가? 아침부터 줄이 꽤 기네. 라마다 호텔이 바닷가랑 가깝구나. 이런 생각만으로도 5키로 러닝은 순삭이었다.
오전 8시 20분
조깅을 하고 들어왔더니 8시 20분. 큰일 났다. 9시에 일을 시작하기 위해 급히 샤워를 했다.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데, 왠지 워케이션 첫날은 숙소에서 일을 해보고 싶었다. 디지털 노마드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숙소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데, 쉬는 곳이긴 하지만 때때로는 일을 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2년 전까지 투잡을 하며 재택근무를 경험했던 나는 생각보다 숙소에서 일하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유튜브에서 내가 좋아하는 플레이리스트를 찾아 TV로 전송 시켜 오피스 분위기도 내보았다. 처음엔 오전에만 숙소에서 일해야지, 했는데 밖으로 나가는 것이 일의 흐름을 끊을 것 같아 퇴근 시간까지 숙소에서 일하게 되었다. 제주에서의 첫 점심 역시 배달 음식으로 해결했다. 그런데도 나에게 숙소는 나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만족스러운 근무 환경이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숙소의 컨디션이 좋아서 가능한 일이긴 했지만.
사실 첫 근무를 숙소에서 하기로 마음먹은 이유 중 하나는 헤어드라이어가 없어서였다. 당연히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드라이어를 챙겨오지 않았던 나는 전날 밤, 급히 쿠팡에서 드라이어를 찾아 주문했다. 평소 머리를 감지 않으면 편의점도 가지 않는 나에게 수건으로 대충 말린 머리로 외출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단단히 이상한 포인트들로 내 첫 워케이션 근무지는 숙소로 정해졌다. (뿌듯)
오후 6시
6시가 땡 되자마자 퇴근 후 제주시청 옆에 있는 다이소에 들렀다. 다이소 거울에 제주까지 와서 후드를 뒤집어쓰고 고무장갑과 물걸레 청소포, 수세미 등을 찾으러 7층 건물을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비칠 때마다 묘한 감정이 들었다. (왜 다이소 계단의 벽은 죄다 거울로 설치했을까?) 거울 속 내 모습은 서울에서 생활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어젯밤 숙소 들어가는 길에 편의점에서 산 4캔 11,000원 캔 맥주와 함께 먹을 1인 피자도 포장해서 숙소로 들어왔다. 하루종일 여기서 일을 해서 그런지 숙소와 급히 친해진 느낌이 들었다. 설거지와 빨래도 잊지 않았다.
오후 10시
밤 10시가 되어 크롬캐스트가 연결된 TV에 놀면뭐하니를 틀어놓고 침대 위에서 스트레칭을 하다가 문득 에어비앤비의 브랜드 캠페인이 생각났다. 여행은 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보는 것. 오늘 내가 했던 모든 행동이 흔히 생각하는 여행의 기준으로 놓고 본다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의 연속이다. 하지만 내가 제주에 있는 시간 동안 숙소는 집이라고 생각하니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현지인처럼 제주에서 살아보는 것? 왠지 모를 자신감이 붙었다. 현관문 너머로 '툭'하는 소리가 들렸다. 헤어드라이어가 도착했나 보다. 내일은 나가서 일해야지.
에어비앤비가 그랬다 여행은 살아보는 거라고 (현재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