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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ipdolee Apr 10. 2022

나는 지금껏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게 아니었어

6박 7일짜리 제주 워케이션: 마지막 일기


이 일기에는 쫌쫌따리 회사 자랑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원한 후회도 없고 영원한 만족도 없다(이전 글)와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3월 1일 화요일


 오전 10시

 오늘이 휴무라는 사실에 밤까지 술을 너무 마셨던 탓일까. 일어나보니 벌써 해가 중천에 뜬 시간이었다. 창밖으로는 봄비가 부슬부슬하게 내리고 있었고, 벌어진 창문 틈 사이로 비가 올 때만 맡을 수 있는 꿉꿉하고 고소한 향기가 코를 자극했다. 제주 워케이션의 마지막 러닝을 해야 하는데, 하루종일 비가 올까 걱정되어 날씨 앱을 켰다. 그런데 곧 그친다는 예보만 있을 뿐, 30분이 지나도 비는 그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전 11시 30분

 약간의 비를 맞으면서 달리는 우중런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 일단 숙소를 나왔다. 이젠 나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광양사거리쯤 도착하니 비가 슬슬 그치기 시작했다. 봄비 때문인지 조금 쌀쌀했지만, 약간의 바람은 러닝하기엔 더없이 좋은 날씨다. 제주 마지막 러닝 코스는 바닷가도 아닌 오로지 내가 가보고 싶었던 카페에 가는 것을 목표로 잡았다. 예전부터 내 버킷리스트에는 항상 여행을 가거나 낯선 지역에 갔을 때 그 지역의 카페를 목적지로 달려보는 꿈이 있었다. 이번 제주 워케이션을 통해 이 버킷리스트를 한없이 완수하고 있지만, 마지막은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제낳제키 친구가 극찬했던 유스커피를 목표로 달리기 시작했다.



 오전 11시 50분

 20분 정도 달리니 목적지인 유스커피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자그마한 크기의 카페였는데, 간판에 쓰인 커피 볶는 집이라는 문구에 걸맞게 로스팅 공간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따뜻한 온기가 몸을 감쌌다. 아마 쌀쌀한 바깥 날씨 덕분에 더 그랬을 테다. 들어가자마자 메뉴판을 보고 산미가 강한 원두를 추천받아 푸어 오버를 주문했다. 커피를 가지고 나갈 예정이었지만, 따뜻한 커피보다는 시원하게 쭉 들이키고 싶은 마음에 아이스로 골랐다. 그렇다고 얼죽아는 아니다. 그렇게 정성껏 내려주신 커피를 가지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다음에 혹시 러닝이 아니라 그냥 들르게 된다면 베이커리도 함께 주문해서 카페 공간을 즐겨보고 싶다. 차마 땀 흘린 채로 카페에서 먹고 가기는 아직 내가 너무 쑥스럽다.



 오후 12시

 커피를 모두 마시고 일회용 컵을 버려야 하는데, 제주도 역시나 서울만큼 길거리에 쓰레기통이 없었다. 이해가 되면서도 아쉬운 부분이다. 서울에서도 시티런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카페에 들러 커피를 테이크아웃해서 마시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쓰레기통을 찾지 못해서 결국 집까지 들고 오는 경우가 허다했다. 중간에 쓰레기통이 보이면 잘 분리수거를 해서 버리고, 남은 거리를 뛰어오고 싶은데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복병을 만난 셈이다. 그래도 제주에서는 버리지 못한 일회용 컵 덕분에 낯선 거리를 걷는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6층 빌딩 유리창 전체에 힙한 시트지가 랩핑 되어 있는 마트 건물이었다. 일러스트부터 색감까지 너무 충격적이어서 자연스레 눈길이 갔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제주에 있는 창고형 마트 브랜드, 마트로라는 곳이었는데 '제주의 코스트코'라고 불리며 체인점까지 있을 정도라고. 이번 마지막 러닝의 가장 큰 수확은 유스커피의 푸어 오버와 마트로의 존재가 아닐까 싶다.



 오후 5시

 집에 돌아오자마자 재빨리 씻고 스타벅스를 다녀왔다. 8시 비행기였기 때문에 시간이 조금 남아 글을 쓰고 돌아왔다. 서울에 있을 때보다 하루를 훨씬 촘촘하고 알차게 쓰고 있는 나를 보며 생각보다 부지런한 사람이구나, 생각했다. 짐을 챙기고 방을 정리하니 지난주, 처음 이 숙소에 왔던 때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근데 마음이 묘하게 울적했다. 그새 이 공간에 정이 들었던 것일까.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일하기도, 쉬기도, 자기도, 놀기도 너무 좋은 숙소였던 건 사실이니까. 심지어 7년 넘게 한 집에서 살았던 나에게는 7일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낯섦편암함을 동시에 선물한 공간이기도 했다. 아침까지만 해도 서울로 돌아간다는 게 크게 와닿지 않았는데, 숙소의 모든 조명을 끄고 현관의 센서등만 오롯이 켜져 있는 모습에 마음이 우울해졌다. 저녁이 아닌 아침이나 낮 비행기였다면 이런 울적함이 조금이나마 덜했을까.



 오후 5시 30분

 숙소 바로 앞에 재활용 도움센터가 있는지라 나오는 길에 일반 쓰레기 배출과 분리수거를 했다. 제주에 갈 때까지만 해도 음식물 쓰레기를 어떻게 처리하는지 몰라서 인터넷으로 엄청나게 찾아봤던 기억이 있는데, 정작 7일 내내 집에서는 음식물 쓰레기가 나올 정도의 음식을 먹지 않아 버릴 것이 전혀 없었다. 내가 듣기로는 티머니 교통카드로 결제를 한다고 들었는데,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한 번 이용해보기로.



 오후 6시

 고등학교 때 고속버스를 하나 놓치며 12시간이나 기다렸던 트라우마 때문에 그 이후로 버스나 비행기 같은 중요한 일정은 매우 보수적으로 움직이는 게 습관이 되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8시 비행기인데 6시에 제주 공항에 도착했다고 말하니 다들 나를 이상한 놈으로 생각하더라. 그런데 난 그 트라우마가 정말 너무 강렬했기 때문에 쉽게 고칠 수 없다는 걸 잘 안다. 너무 서둘렀던 나에게 주어진 건 제주 공항 내 푸드코트에서의 마지막 식사. 제대로 된 밥 한 끼를 못 먹었던 하루여서 쌀밥이 너무 당겼기에 메뉴는 비빔밥으로 정했다.



 오후 9시 10분

 일주일 만에 서울 육지 땅을 밟았다. 1시간이란 짧은 비행이었는데, 왜 이렇게 피곤할까. 해외여행을 한 번도 안 가본 나로서는 해외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내심 신기해진 순간이었다. 이렇게 보니 여행 갈 때야말로 정말 체력이 필수겠구나, 싶었다. 무엇보다도 내일 아침에 당장 사당으로 출근해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감이 컸다. 분명 집에 가서 짐을 풀면 밤 12시는 훌쩍 지나서 잘 게 분명했으니 말이다. 제주를 조금이라도 더 즐기고 싶어서 저녁 비행기를 골랐던 내 잘못이었을까?



 제주 워케이션을 끝내며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사진 앱을 열고, 제주에서 찍었던 사진들을 하나씩 정리했다. 매일 잘 때만 해도 제주를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진을 놓고 보니 7일간 그 누구보다 부지런하게 제주를 즐기고 있었다. 렌터카 하나 없이 대중교통만으로 가고 싶었던 카페를 찾아가고, 남는 시간에 영화관에서 혼자 영화도 보고, 심지어 하루도 빠짐없이 제주를 달렸다. 밤에 산책도 즐기고, 오랜만에 제주에 사는 제낳제키 친구도 만났다. 비행기도 하루에 열 번씩, 정말 원 없이 봤다. 이보다 더 보람찬 제주 워케이션이 어딨을까. 생각보다 나는 순간마다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이번 제주 워케이션으로 얻은 가장 큰 수확은 나만의 여행 스타일을 찾았다는 것. 제주 워케이션을 가기 전, 나에게 여행은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은 활동이었다. 성격상 함께 가는 사람에게 맞춰야 하는 것도 많고, 여유 없이 빡빡한 스케줄을 소화해야 하는 것까지 싫은 것들 투성이었다. 게다가 낯선 공간에 적응할 때쯤 되면 다시 돌아오는 것도 불만이었고. 하지만 이번 워케이션은 달랐다. 혼자 낯선 공간에 떨어졌을 때도 나는 무리하지 않으며 그 공간에 적응하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하고픈 건 정말 다 하고 지냈다. 그럴 때마다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였다면 오히려 제주를 즐기지 못했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 생각엔 지금도 변함이 없다. 누군가와 함께 제주를 즐기는 것도 나름의 매력이 있겠지만, 워케이션이라는 특수한 목적으로 찾아온 제주에서는 업무와 나 자신만 생각해도 꽤 버거웠기 때문이다. 그러니 약간의 외로움만 견딜 수 있다면 혼자서 일과 함께 제주를 찾는 건 너무나 추천하고픈 경험이다. 나 역시 다음에 제주로 워케이션을 다시 가게 된다면 지금보다 더 큰 성장과 생각을 담아오지 않을까?






6박 7일짜리 제주 워케이션 일기

어느 날 갑자기 회사에서 워케이션을 보냈다

에어비앤비가 그랬다 여행은 살아보는 거라고

사장님 혹시 와이파이 비밀번호가 어떻게 되나요

워케이션의 주말은 왜 평소보다 더 바쁜 걸까요

난 몰랐어 제주가 이리 다채로운지

영원한 후회도 없고 영원한 만족도 없다

나는 지금껏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게 아니었어 (현재글,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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