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나는 참 잘 싸웠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싸웠다'기보다는 '투닥거렸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심각한 말싸움도, 감정이 상하는 갈등도 아니었다. 그냥, 어느 쪽도 진심은 아닌데 왠지 꼭 한 번씩 물고 늘어지는 일들. 지나고 나면 아무렇지도 않은데 그 순간엔 왜 그렇게 진지했는지 모를 소소한 실랑이들.
거실 탁자 위 리모컨을 두고 누가 먼저 눌렀는지를 가지고 옥신각신했다. 아빠가 틀어놓은 주식 프로그램에 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봐라, 엄마는 이런 거 싫어하는데" 하며 엄마에게 일러바치겠다는 농담으로 아빠를 건드리면. 아빠는 이에 질세라 "이 집에는 내 편이 없어! 다 엄마 편이야." 하고는 못 들은 척 채널을 휙 돌려버리곤 했다. 그러면 나는 엄마한테 이르는 게 싫으면, 내가 보고 싶은 걸로 보여달라며, 우리는 또다시 채널을 두고 티격태격했다. 마치 짜여진 각본처럼.
이야기를 끝맺는 방식도 늘 같았다. 치킨이 도착하고, 아빠는 껄껄 웃고, 나는 한 조각 늦게 손을 뻗었다. 그 모든 순간이 그때는 그저 일상이었다. 아무런 감흥 없이 흘러가는 하루의 일부. 너무 익숙해서 그게 소중한 줄도 몰랐다. 별것 아닌 이야기들, 툭 내뱉던 말투, 말장난 같은 농담, 눈치로만 오가던 대화.
하지만 지금은 그 모든 것들이 하나하나 선명하게 떠오른다. 이제는 다시 꺼낼 수 없는 장면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는 싸울 수 없다는 것, 다시는 웃으며 삐칠 수 없다는 것. 그건 생각보다 훨씬 큰 부재로 다가온다.
나는 사람을 그리워한다는 게 그 사람 자체를 생각하는 일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사람과 내가 나눴던 '관계의 리듬'을 견디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아주 편안했던 사람, 아무렇지 않게 다퉈도 괜찮았던 사람, 내가 조금 못되게 굴어도 다 받아주던 사람. 그런 관계가 사라졌을 때 생기는 낯선 정적은 말할 수 없이 허전하다.
그 허전함은 단지 말이 끊겨서 오는 게 아니다. '내가 마음을 걸 수 있는 말투'가 사라졌다는 것, '내 말에 꼭 돌아오던 반응'이 더 이상 없다는 것. 그게 슬픔의 본질이었다.
사랑이 늘 감동적인 말로 주고받는 줄 알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사랑은 오히려 그 사람 특유의 말투였고, 눈을 흘기며 건네던 농담이었고, 누구 하나 먼저 사과하지 않아도 괜찮던 시간들이었다. 말이 많지 않았던 아빠였지만 우리는 말이 통했다. 투닥거림 속에서 서로를 너무 잘 알았고, 말하지 않아도 아는 것들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싸우면서도 웃을 수 있었고, 침묵 속에서도 곁에 머물 수 있었다.
그 모든 말의 리듬이 사라진 지금, 나는 문득문득 말을 걸게 된다. 아빠가 자주 보던 채널을 돌리며, 아빠가 좋아하던 치킨을 먹으며, 아빠가 자주 앉아있던 소파에 괜히 앉아보며.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는 방향을 향해 말을 건다. 대답이 없어도 그 사람의 말버릇이 머릿속에서 떠오르고, 그 웃음이 상상되는 날들이 있다.
그럴 때면 말을 잃는다는 건 '대화의 부재'가 아니라 '마주할 수 없다는 실감'이 계속 이어지는 일이라는 걸 느낀다. 그래서 이 글은 그때는 몰랐던 사랑의 방식에 이제라도 닿아보려는 내 방식의 인사다. 너무 늦은 사과 같기도 하고, 아무도 듣지 않는 혼잣말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 모든 말들이 사라진 사람에게 향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남겨진 사랑이었고, 여전히 그 사람과 나 사이의 연결이었다.
나는 아빠를 이렇게 기억하고 싶다. 다툴 수 있었던 사람. TV 리모컨을 뺏아올 수 있는 사람. 내가 마음껏 삐칠 수 있었고, 그걸 보고 먼저 웃던 사람.
사랑은 그런 것이다. 사라지고 나서야, 그 사람과의 투닥거림이 얼마나 큰 사랑이었는지를 천천히 깨닫게 되는 것.
아빠, 그거 기억나?
아빠가 그랬잖아. 내가 치킨을 너무 좋아하니까,
하림치킨너겟 사장 아들이랑 결혼시키겠다고.
근데 나랑 한 약속 안 지키고, 혼자 어디 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