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2
어렸을 땐 아빠를 안고 뽀뽀하고, “사랑해”라고 말하는 게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툭 치면 무릎에 앉았고, 볼을 비비며 장난을 걸었다. 아빠는 그럴 때마다 웃으면서 나를 품에 안아주셨다. 그 시절의 사랑은 공기 같았다. 숨 쉬듯 당연했고, 햇살처럼 따뜻했다. 그래서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괜찮을 줄 알았다.
하지만 중학생이 되면서, 모든 게 조금씩 어색해졌다.
내가 바뀐 건지, 세상이 바뀐 건지 모른 채, 자꾸만 말을 삼켰다.
어느 날 아빠가 언제나처럼 장난스럽게 말했다. “볼 뽀뽀 해줘~”
나는 그말에 “싫어.”라고 답했다. 그리고는 그 말이 끝나자마자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날 이후로 아빠는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않으셨다. 다시 웃으며 장난치지도, 먼저 안아달라고 하지도 않았다. 그 짧은 말 한마디가, 아빠 마음에 어떤 식으로 남았을까. 그 침묵에, 나는 너무 늦게서야 닿았다.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싫어’가, 누군가에겐 아주 오랜 가을처럼 머무를 수 있다는 걸 나는 그때엔 몰랐다.
시간은 흘러 고3 겨울, 입시 시험을 치르기 위해 아빠와 함께 서울로 갔다. 입시 시즌이라 근처 모텔, 호텔은 이미 만실이었고 간신히 방 하나를 예약할 수 있었다. 낡은 모텔방, 퀘퀘한 냄새가 맴돌았다. 아빠는 당연하다는 듯 소파에서 자겠다고 했다.
나는 어색한 그 상황이 싫어 말했다.
"무슨 소파야, 같이 자면 되지." 그러자 아빠는 잠시 망설이다 "그럼 내가 거꾸로 잘게"라고 하셨다. 결국 우리는 한 침대에 반대로 누워 잤다. 나는 아빠의 발을 보며, 아빠는 내 얼굴이 닿지 않도록 머리를 반대쪽에 두고 누우셨다.
그때는 그냥 좀 웃겼다. 그 어색한 배려가 재미있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아빠는 아직도 내가 사춘기인 줄 알았던 거다. 본인을 피할까 봐, 가까이 있는 걸 싫어할까 봐, 아무 말 없이 거꾸로 누워 있었던 거다.
그날 밤, 우리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그 거리는 참 이상하게 느껴졌다. 가까이 있는데도 이상하게 멀었다.
하지만 내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남은 건,
그보다 훨씬 오래전의 기억이다.
중학생이던 어느 날, 성당 지하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늦어져 아빠에게 전화를 해 데리러 와달라고 부탁했다. 아빠는 그런 나를 데릴러 성당까지 와주셨다. 나는 여전히 지하에 있었고, 아빠는 도착해서 나를 찾으러 성당안으로 들어오던 길에 내가 따르던 선생님을 마주쳤다.
"우리 딸 좀 불러주세요."
그 말을 남기고 아빠는 다시 차로 향하셨다.
잠시 뒤, 그 선생님이 지하로 내려와 말했다.
"할아버지가 데리러 오셨어."
할아버지? 그게 아빠라는 걸 나는 알았고, 그 말이 너무나 선명하게 들렸다.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때부터도 이미 새하얗던 머리를 한 우리 아빠를 보고 그렇게 말한것이 분명했다. 그 사실을 부끄러워하는 듯한, 어린 날의 이기심이 순간 나를 덮쳤다.
"아니에요! 할아버지 아니고 아빠예요!"
나는 꽤 큰 소리로 외쳤다.
계단을 뛰어 올라가 차 문을 열고 들어가서, 아무 말 없이 엉엉 울었다. 아빠는 왜 우냐고 물으셨지만, 나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과 울음이 가득한 차 안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방으로 들어 온 엄마가 물었다.
"아까 왜 울었어?"
나는 베개를 끌어안은 채 엄마에게 말했다.
"아빠를... 할아버지라고 했어."
엄마는 잠시 말이 없더니 조용히 말했다.
"그런 걸로 울지 마. 아빠는 다 알아. 마음 안 좋으실 거야."
나는 "응, 알겠어"라고 대답했지만, 속에서는 울음이 또 올라왔다. 내 부끄러움이 아빠에게 상처가 되었을 거라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저녁,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거실에서 아빠를 다시 마주했다. 아빠의 머리카락이 까맣게 염색되어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빠는 염색약에 들어있는 성분인 옻에 알레르기가 있어서 염색을 하면 두피가 뒤집어지듯 아픈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동안도 염색을 하지 못하고 다니셨던건데, 그런데도 아빠는 그날 까맣게 변한 머리를 한 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소파에 앉아 계셨다.
그 말이 없었던 순간이 나는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그건 '아빠를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던 딸'과
'딸에게 상처가 되지 않기를 바랐던 아빠'가
조용히 서로를 바라보던 순간이지 않았을까.
사랑한다는 말 대신,
서로의 마음을 깊숙이 헤아리던 가장 아픈 고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