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1
우리 방 한가운데서 아빠랑 내가 동시에 “어?” 하고 멈췄던 날이 있다. 순간 둘 다 얼어붙었다가, 한 박자 늦게 빵 터져 웃었던 그날. 그땐 그저 웃음이 터지는 순간이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 모든 게 다정했던 사람이었다.
아빠는 가끔 과하게 진심이었다. 특히 딸에 관해서는.
쌍꺼풀 수술을 한 며칠 뒤, 나는 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을 찾아야 했고, 아빠가 함께 가주었다. 그렇게 다 끝나고 아빠와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차창 밖으로 스치는 풍경만이 흐르고, 아빠는 무심한 듯 핸들을 돌리고 있었다. 눈에 실밥이 덕지덕지 붙어 있던 나는 마스크와 모자로 얼굴을 반쯤 가린 채 조용히 옆에 앉아 있었다. 그 고요함이 좋았다.
그런데 옆 차선에서 끼어들던 차와 부딪히는 사고가 났다. 상대 운전자는 처음엔 잘못했다고 하더니, 이내 태도를 바꿔 "자기 잘못 아니다"라며 버텼다. 아빠는 화가 나셨고, 결국 보험회사와 경찰까지 부르게 되었다. 한창 현장 정리가 한창이던 중, 누가 내게 상황을 물어보려 다가왔다. 아빠는 갑자기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우리 딸 아파요! 수술했어요, 지금 말 시키면 안 돼요!”
경찰과 보험 직원은 멈칫했고, 나는 순간 얼굴이 화끈거려 고개를 숙였다. 쌍꺼풀 수술이었다. 진짜 아픈 것도 아니었고, 실밥도 거의 다 말랐는데. 아빠는 그걸 끝까지 진지하게 감쌌다.
그 모습이 웃기면서도, 지금에 와서는 그 모습마저 찡하다.
누군가 나를 향해 손을 뻗기 전에 먼저 막아선 사람,
우리 아빠였다.
19살 겨울, 크리스마스였다. 친구들이 우리 집에 놀러 왔다. 파티랄 것도 없었다. 케이크도, 장식도, 아무 준비 없이 그저 우리끼리 웃고 떠들고 있었는데- 갑자기 아빠가 말도 없이 외투를 챙겨 나가셨다.
잠시 후, 작은 케이크 상자를 들고 돌아오셨다.
“이거라도 먹으면서 놀아.”
그 케이크 하나로 우리는 촛불도 켜고, 생크림 묻히며 진짜 크리스마스 파티를 했다. 그때는 그저 “우와 케이크다~” 하고 넘어갔지만, 지금 생각하면 자꾸 울컥해진다.
아빠는 그 자리에 끼지는 않았지만,
그날의 크리스마스를 조용히 완성해 주었다.
그게 사랑이었다는 걸, 나는 나중에서야 알았다.
그보다 더 오래 기억에 남아 있는 건 내 방을 처음으로 꾸미던 날이다. 더 큰 집으로 이사했을 때, 나는 꼭 흰 벽지에 2층 침대를 갖고 싶다고 고집을 부렸다. 엄마는 반대했지만, 아빠는 조용히 카드를 내밀며 말했다.
“갖고 싶은 걸로 골라서 주문해.”
아빠와 나는 함께 방에 흰색 페인트를 칠했고, 벽을 덧칠하며 엄마 몰래 내 방을 만들어갔다. 2층 침대가 도착한 날, 우리는 조립 설명서를 펼쳐 놓고 뚝딱뚝딱 조립을 시작했다.
아빠는 내가 주문한 침대가 든, 큰 박스를 보며 투덜거렸다.
“야, 이거 왜 이렇게 무겁냐. 이런 걸 골랐어.”
다 조립하고 나니, 침대 다리가 너무 길어서 방 천장에 닿을까 봐, 아빠가 직접 다리를 자르기로 했다. 나는 반대편 다리를 붙잡고 있었고, 아빠는 톱으로 자르고 있었다. 다리가 잘려나가며, 내가 잡고 있는 쪽으로 침대가 기울어 무게가 쏠리니 혼자 버티는 게 쉽지 않았다.
“아빠, 빨리 잘라!”
그런데 그다음 불쑥 튀어나온 말이 실수였다.
“진짜 존나 무거워!!!”
말을 뱉고 나서 나도, 아빠도 순간 멈췄다. 서로를 쳐다봤다.
“…어?” 그리고 그 어색함에 둘 다 빵 터져서 웃었다. 웃으니까 더 힘이 빠졌고, 침대는 더 무거워졌고, 나는 결국 “아아, 아빠 진짜 웃기지 마, 무거워!!” 하며 울먹이다시피 외쳤다. 아빠는 옆으로 다가와 “으이고~” 하며 나 대신 침대를 붙잡아주었다. 그러고도 우리는 한참을 웃었다.
떠올리기만 해도 웃음이 나는 그 순간.
우리 둘만의 방, 그 한가운데에 남겨진 추억이었다.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된다.
그런 장면들이, 그런 말투와 행동들이 얼마나 다정했는지를.
아빠는 늘 무심한 얼굴로 조용히 웃고 있었다. 별말 없이 밥을 차리고, 묻지 않아도 내가 늦는 걸 알고 있었다. 말이 없던 사람이었지만, 조용한 마음만은 누구보다 크게 전해지던 사람이었다.
그땐 왜 그런 게 따뜻하다고 생각하지 못했을까. 말이 없으니까 관심도 없는 줄 알았고, 표정이 없으니까 감정도 없는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은 안다. 그 고요한 순간들이 다 다정이었다는 걸. 차가운 손으로 컵을 건네주던 일, 마트에서 김이 서린 봉투를 들고 오던 모습, 늦게 하교하는 내가 걱정이되, 항상 차를 끌고 데리러 와주던 날들.
그런 장면들이 자꾸 생각나서, 나는 가끔 이유 없이 울컥해진다. 그게 전부였고, 지금도 그걸 하나씩 꺼내며 웃는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닮고 싶다고 생각한다.
사랑을 설명하지 않고도 남길 수 있는 사람. 말이 아니라 손으로, 눈빛으로, 뒷모습으로 다정했던 사람.
그러니까 다 지나고 나서야 안다.
정말 중요한 건 늘 조용히 곁에 있었단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