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엄마를 자주 챙긴다. 쇼핑을 하다가도 예쁜 걸 발견하면 내 것보다 엄마 것을 먼저 고르고, 약을 사 먹으려다 문득 엄마 생각이 나서 ‘엄마도 뭐 좀 챙겨 먹어!’ 하며 덜컥 용돈을 보내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늘 같은 말을 한다. “너 하고 싶은 거 해,” “엄마는 괜찮아.” 그러면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게 이거야”라는 나답지 않은 닭살 멘트를 날린다.
요즘은 내가 아니면 누가 엄마를 챙겨주지?라는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아, 물론 친오빠도 엄마에게 너무너무 잘하고 있지만!)
그런데 이상하게도 엄마에게 뭘 해줄수록, 마음 한쪽에서는 아빠가 더 또렷하게 떠오른다. 나는 아빠한테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좋아하는 음식을 사드린 적도, 생신에 케이크를 준비한 적도 거의 없다. 같이 찍은 사진도 몇 장 되지 않고, 선물 하나, 편지 한 장도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늘 당연히 곁에 있는 사람이었고, 늘 마지막에 챙겨도 괜찮을 것 같은 사람이었기에, 나는 너무 오랫동안 표현을 미뤘다. 그러다 끝이 왔다. 말 한마디, 손 한번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작별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야 깨달았다. 사람은 늘 '나중에'라는 말 뒤에 가장 중요한 감정을 숨겨둔다는 것을. 그리고 늘 '나중에'라는 말을 믿는다. 더 좋은 때, 더 적절한 기회, 더 준비된 감정을 기다리면서. 그렇게 미뤄진 말들이 사람이 사라진 후에야 하나둘 떠오른다. 그게 유난히 많았던 관계가 바로 아빠였다. 나는 아빠한테 하고 싶은 말이 많다. 근데 그중 대부분은 하지 않은 말들이고, 지금은 할 수 없는 말들이다.
고마워. 미안해. 사랑해. 그곳에선 편안히 잘 지내면 좋겠어.
물론 그 말들을 다 꺼내, 누구에게도 전할 수 없지만,
그게 내가 아빠한테 하는 요즘의 대화였다.
사람이 떠나고 나면 그 사람 자체보다 그 사람에게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이 더 오래 견딜 수 없게 만든다. 관계라는 건 결국, “내가 그에게 계속 말을 걸 수 있는가”의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침묵을 나누던 사이라 해도, 내가 언제든 말을 걸 수 있다는 믿음은 그 관계를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줄이었다. 그 줄이 끊긴 지금, 나는 자꾸만 반대편 없는 대화를 흘려보낸다.
아빠, 나 지금 엄마 잘 챙겨. 예전보다 훨씬 잘해. 근데 엄마한테 뭘 해줄수록 자꾸 마음 한쪽이 시려. 왜일까. 아무래도 내가 엄마한테 해주는 그 다정한 일들을 당신한테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이제 와서야 너무 미안한가 봐.
엄마에게는 '지금'이 있는데, 당신에게는 이제 내가 줄 수 있는 '지금'이 없다는 게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쓰인다. 사람은 그렇게, 누구에게 잘할수록 다른 누군가에게 더 미안해지는 존재인가 보다. 그게 인간의 방식인지, 사랑의 순서인지, 아니면 애도의 한 방식인지 나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아빠, 원래 다들 그러잖아,
잃고 나서 소중한 걸 알게 되는 거 말이야.
그래서 이제야 이렇게 말해. 조금 늦었지만 말이야.
고마워. 아빠가, 내 아빠라서.
아빠로서, 내 곁에 있어주었던 그 시간 덕분에,
나는 또 이렇게 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