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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예예 Mar 05. 2022

덤덤한 부부의 세계

나는 덤덤한 스타일이 아닌데

얼마 전 큰맘 먹고 예쁘고 비싼 가벽을 하나 샀다. 꼬박 2주 남짓을 기다려서 받았는데 길이를 잘못 주문해서 방에 세울 수 조차 없었다. 주문 제작이라서 교환, 환불도 불가. 탓할 곳도 없었다. 얼른 갖고 싶은 마음에 급하게 주문하던 지난주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이 거대한 세로 240센티, 폭 60센티의 가벽을 거실에 뉘어 두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기대와 설렘의 크기만큼 자괴감이 밀려왔다. ‘한 번 더 확인했더라면 중간에 바꿀 수라도 있지 않았을까? 아니 애초에 주문 전에 잘 적었는지 봤으면 됐잖아?’


별 수 없이 사실대로 남편에게 말했다. 당연히 한 소리 할 줄 알았는데 그의 반응은 잔잔했다. “아 그럼 어쩔 수 없지. 어떡하나...” 그가 보인 반응의 전부였다. 왜 별소리를 안 하냐는 질문에 이어진 답변도 간단했다. 벌어진 일이고 이왕이면 그래도 쓸 수 있는 방향으로 해결방법을 찾아보면 되지 않겠냐고. 그렇게 갖고 싶어 했던 건데 만약 우리 집에 설치할 수 없다면 좀 싸게라도 팔고 재주문을 하자고. 그의 말을 듣고 감동을 받긴 했는데 그 보단 좀 당황스러웠다. 사실 누가 문제를 만들었건 간에  당황하고 호들갑 떠는 건 내 쪽이다. 웬만해서 그는 당황하지 않는다. 당황했다 하더라도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컵을 깨도 소리를 지르는 건 나, 그냥 치우면 되는 일이라고 하는 건 그다. 매사에 그는 참 덤덤하다.


고마운 덤덤

그의 덤덤함은 내게 참 유익하다. 모든 상황을 한 발짝 떨어져서 객관적으로 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어떤 감정이 과잉되기 전에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게 만드는 반응이랄까. 이번에도 그의 말을 듣고 그가 내게 한 소리 할 거란 우려와 스스로를 향한 자괴감을 털고 얼른 현재 할 수 있는 일들을 했다. 가벽 재질을 알아보고, 길이를 자르기 위해 목공 비용을 알아보고, 판매자에게 이런 경우 어떤 조치가 최선일지 문의를 남겼다. 다행스럽게도 판매자님이 목공 업자를 부르는 것보다 근처 목공소를 찾아가면 훨씬 저렴할 거란 조언을 주셔서 거의 20만 원 돈을 아낄 수 있었다.(목공 업자 출장비용은 20만 원 이상, 목공소 재단은 5천 원) 집 근처에 목공방이 있는 것도 행운이었다.


다정한 덤덤

목공방까지 걸어서 5분이지만 어쨌든 2미터가 넘는 가벽을 들고 이동하는 일이 남았다. 둘이 낑낑거리며 가벽을 옮기고 다시 찾아오기까지 그는 한 마디 잔소리나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냥 다분히 일상적인 대화만을 나눴을 뿐이다. 그의 덤덤함은 다정스러운 면이 있다. 문제에는 덤덤하고 나의 마음에는 다정하다. 만약 그가 내 걱정대로 내게 “꼼꼼히 좀 확인해 보지!”하고 책망부터 했더라면 나는 스스로를 더 자책하고 한참을 더 괴로워했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세계

그가 많이 하는 말이 있다. "자연스러운 일이야." 내가 불안해하고 걱정하는 순간들마다 그는 이 상황과 내가 겪는 감정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말해주곤 했다. 그 말은 그가 살아온 삶에서 온 깨달음이자 진심으로 건네는 나름의 위로였을 것이다. 그 말을 들을 때면 늘 내 마음이 움직였기 때문이다.


나와 다른 성향과 기질을 가진 사람, 그 사람이 가진 생각의 크기만큼 내 세계도 넓어지는 것 같다. 나처럼 볼 수도 있고, 너처럼 볼 수도 있다. 우리의 세계는 나날이 더 확장되고 있다.


문제의 가벽, 예쁘긴 참 예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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