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포천시 전통술박물관 산사원, 경상남도 함양군 명가원
1994년 5월 30일 월요일 맑음
제목: 아버지의 훈련 가기 전
오늘은 우리 부대 간부들 훈련이 있다. 아버지께서는 아침 5시부터 준비를 하셨다. 나는 그것을 모르고 6시까지 늦잠을 잤다. 훈련 가는 시간은 6시 30분이다. 일어나 보니 아버지께서는 나가시려고 신발장에 들어섰다. 나는 벌떡 그쪽으로 달려갔다. 아버지께선 토요일까지 6시 퇴근 차를 타고 들어오라고 타이르셨다. 나가기 전 나는 아버지께 인사를 하고, 뽀뽀도 했다. 그 후부터 집이 쓸쓸해졌다.
결혼 준비를 하게 되면서 본가 짐을 정리하던 중, 엄마가 보관해 둔 초등학생 시절 일기장을 건네받았다. 20여 넘게 존재를 잊고 있던 4학년 나의 일기장, 5월의 마지막 일기에는 아빠가 주인공이었다.
당시 기억이 뚜렷하지 않지만, 늘 훈련을 가시는 아빠를 그리워했던 감정을 일기장에 적어둔 11살 소녀였던 것 같다. 흐린 기억 속 아버지는 늘 군복 차림이셨다. 안방 옷장에 양복 한 벌이 다였던 아빠는 평생을 군복을 입고 일을 하셨기에 내게 아버지는 늘 변함없이 푸르른 나무를 떠올리게 했다.
나무에는 나이테가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무줄기가 굵어지고, 나이테는 더욱더 많아진다. 오로지 한자리에서 고독하게 바람과 비를 맞으며 나무는 자라고 나이테를 남긴다. 동화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나무의 성장과 함께 소년에서 어른이 되어가는 이야기를 그려주고 있다.
동화 끝자락에는 나무는 나이테만 덩그러니 남은 나무 밑동까지 소년에게 건넨다. 소년에게 모든 것을 주고 떠났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고 떠났다. 나이테는 사람에게도 있다. 주름살이 그러하지 않을까? 나이가 들수록 늘어나는 주름살이 야속할 때도 있지만, 그만큼 성장했고 어른이 되었다는 증거다.
주름 가득한 아빠를 볼 때면, 수많은 시간을 거치며 묻은 삶의 연륜이 묻어난다. 흰머리 지긋한 할아버지가 된 아빠지만, 내게는 늘 사계절 푸르른 나무 같다. 변함없이 곁을 지켜주는 나무를 닮은 양조장 두 곳을 찾아 아빠와 여행을 떠났다.
경기도 포천시에 위치한 산사원은 200년 넘은 산사나무들이 문지기처럼 우리를 맞이한다. 이름 산사원은 ‘산사나무의 정원’이란 뜻으로 이곳은 배상면주가에서 개관한 양조장이다. 1996년 11월에 열어 2014년 찾아가는 양조장으로 선정되어 20여 년 넘게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산사원 안에는 전통술박물관도 자리한다.
박물관 안은 옛적 술을 빚던 여인네들의 이야기 닥인형으로 재치 있게 전시되어 있다. 한눈에 볼 수 있는 우리 술과 배상면주가의 역사도 볼거리다. 박물관을 벗어나 밖으로 나오면 드넓은 정원이 눈앞에 펼쳐진다. 무려 1만 3,000m2에 달하는 정원에 12그루의 산사나무와 수많은 술 항아리들이 드리워져 풍취를 자아낸다.
정원에는 옛 선비처럼 풍류를 즐겼을 법한 세월랑, 부안당, 우곡루, 유상곡수, 취선각이 자태를 취한다. 아빠와 함께 술이 익어 가는 세월랑을 지나 취선각에 앉아 신선놀음을 즐기다, 차와 다과를 파는 한옥카페 ‘다주헌(茶酒軒)’에서 여유를 부려보았다. 산사원에서는 전통술박물관 지하 판매 장터에서 배상면주가 제품들을 판매한다.
탁주, 증류주, 과실주 등 골고루다. 어떤 술 중에 살지 고민된다면 주저 말고 시음해 볼 수 있다. 나의 선택은 ‘느린마을 막걸리’다. ‘2017 대한민국 주류대상’ 탁주 생막걸리 부문에서 수상한 우리 술이다. 막 공정을 마친 막걸리 맛은 풍선껌처럼 달달하면서도 풍성하다. 시간이 지나며 단맛이 차츰 사라지고 신맛이 올라오는 술이다.
아빠의 선택은 ‘막걸리 1977’. 이름에는 각별한 사연이 있다. 1965년 식량부족으로 인한 양곡관리법 시행으로 쌀 대신 밀이나 잡곡이 막걸리 양조에 사용되었다. 그러다 1977년 쌀 소비 억제 정책이 풀리며 빚기 시작해 지어진 술이다. “어릴 적 주전자 심부름하던 그 맛 그대로네.” 옛 추억을 다시 맛본 아빠의 미소가 아이 같다.
눈을 감고 200년 넘은 산사나무의 나이테를 그려 보았다. 덩달아 아빠의 미소와 주름살이 뒤따라온다. 첫 딸을 보고 미소 짓던 아빠의 기분은 어떠했을까? 훌쩍 자란 딸과 둘이 여행하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실까?
술 항아리 가득한 산사나무 정원을 아빠와 함께 천천히 거닐어 보았다. 다시는 오지 않을 지금, 우리 사이가 200년 넘은 산사나무 같기를, 산사원에서 기억의 나이테에 깊이 새겨 보았다.
사계절 푸른 나무, 소나무를 닮은 우리 술을 찾아 아빠와 경상남도 함양으로 여행을 떠났다.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에는 소나무로 둘러싸인 고즈넉한 고택이 자리 잡고 있다. 어디서 본 듯싶었더니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에서 여주인공 고애신 (김태리 역)이 살던 집, 하동 정씨 가문의 일두고택(一蠹古 宅)’이다.
함양 개평한옥마을에는 하동 정씨 집안 대대로 500여 년이 넘게 가양주(집에서 빚는 술)를 빚고 있다. 현재 박흥선 대한민국 식품명인이 그 전통을 이어 오고 있다. 술을 빚는 양조장과 시음과 체험을 할 수 있는 솔송주 문화관과 명가원, 일두고택이 가까이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서는 ‘솔송주’와 ‘녹파주’ 그리고 ‘담솔’을 빚고 있다.
솔송주는 지리산에서 내려온 맑은 물에 품질 좋은 햅쌀과 솔잎, 송순을 넣어 만든 술로 무형문화재 35호로이기도 하다. 최근 2019년 청와대 지정 설 차례주로 지정되기도 했다. 13도 약주로 이름처럼 솔향기가 워낙 일품이라, “향만으로도 취한다는 말이 정말이네!”라며 아빠와 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고려시대 선비들의 고급약주로 사랑받았다는 15도 녹파주와 솔송주를 2년간 저온 숙성시킨 40도 담솔도 놓치지 말아야 할 솔송주의 자랑거리다. 모든 제품은 일두고택 앞 솔송주 문화관에서 시음 가능하고, 방문객들을 위한 체험 프로그램(10인 이상 예약시)도 운영되고 있다.
천년 소나무 숲의 기운을 그대로 담은 우리 술 한잔하며 일두고택을 거닐고 싶다면, 이곳에서 하룻밤도 가능하다. 다음번 함양 여행에서는 아빠와 함께 은은하게 퍼지는 소나무향을 벗 삼아 달빛 아래 툇마루에서 하룻밤 한옥스테이를 해봐야겠다.
글 오윤희
전국 방방곡곡 우리 술 양조장을 탐하기 시작했습니다. 수제 맥주 여행에도 함께하곤 했던 ‘볼 빨간’ 동행, 아빠를 벗 삼아 말이죠. 인스타그램 sool_and_journey
사진 김정흠
일상처럼 여행하고, 여행하듯 일상을 살아갑니다. 아빠와 딸이 우리 술을 찾아 전국을 누빈다기에 염치없이 술잔 하나 얹었습니다. 사진을 핑계로. 인스타그램 sunset.kim
주소: 경기도 포천시 화현면 화동로 432번길 25 배상면주가
오픈: 매일 08:30~17:30(설, 추석 휴무)
전화: 031 531 9300
홈페이지: www.sansawon.co.kr
입장료: 성인 3,000원
체험 프로그램 | 가양주 빚기 3만원, 세실주 빚기 3만원, 과실주 빚기 4만5,000원(1인 기준, 소요 시간 120분, 4인 이상 가능)
주소: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창촌길 3
오픈: 매일 09:00~17:00(공휴일 휴무)
전화: 055 963 8992
홈페이지: www.mgw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