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이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2024. 12. 16 율이 생후 196일의 기록

by 곰곰

어제 세 식구가 오붓하게 외식을 한 후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 들러 이유식 재료를 골랐다. 이번 재료는 '단호박'. 지금까지 맛보았던 '쌀, 오트밀, 소고기, 애호박, 브로콜리' 중 제일 단맛이 있으니 좋아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고 얼른 만들어서 맛보게 해주고 싶었다. 당일 아침에 만들어 먹이기엔 정신이 없을 것 같아 어제 미리 만들어두었다.


그리고 다가온 이유식 시간

기대감에 앉아있는 나, 나를 바라보는 율이


이전의 이유식처럼 먹고 나면 발을 동동거릴 줄 알았는데 질퍽이는 질감 때문인지 생각보다 좋아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율이가 다 먹어주었다. 이렇게 잘 먹어주니 힘이 난다. 이 힘으로 해나간다.


이유식을 하면서 가장 많이 떠오르는 단어가 있다면 '정성'. ‘아가는 정말이지 정성으로 크는구나.’ 당연한 말 같지만 이 문장을 일상에서 진하게 체감할 때면 새삼스레 얼마나 작은 생명체인지, 이 아가는 지켜줘야 할 존재라는 것을 다시 새기게 된다.


율이가 요로감염 이슈가 있었을 때 나는 범인을 쫓는 형사 같단 생각을 했었다. 요로감염이 행여 재발했을까 봐 어떤 의심되는 단서 같은 것을 찾기 위해 상당히 미세하게 포착하려고 애쓰던 시간이었다. 가령 기저귀에서 나는 약품냄새 같은 것 말이다.

이유식을 준비하면서는 영양사가 되어 가고 있다. 이유식 만들기의 지침이 되어주는 책 2권을 틈틈이 읽고 있었는데 책에 있는 식단대로 진행하려고 했으나 이것은 참고용일 뿐이라는 것을 직접 먹여보며 알게 되었다. 이젠 내가 식단을 구성할 때가 온 것이다.


최근 아는 동생이 보내준 자료를 보며 재료 간에도 궁합이 있고 채소에도 고기 못지않은 철분이 들어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책에 있는 식단을 참고하고 재료 간의 궁합을 고려해 다음번에 테스트할 채소를 선택했다. 바로 '청경채'


퇴근길 남편에게 청경채를 사다 줄 것을 요청하며 어떻게 재료를 손질해야 하는지 책을 보며 익혔다. 이유식을 하며 일상이 또 새롭게 변화하고 있다.


율이 이유식을 한 지 13일째. 채 한 달도 안 됐지만 이유식 시작 이래 준비해 준 양은 모두 먹어주며 '완밥' 행진을 해주는 덕분에 생각보다 빨리 하루에 두 끼를 먹게 됐다.


사실 이유식을 하며 고민 아닌 고민은 바로 뒷정리였다. 입술 주위, 볼, 콧구멍, 목 사이, 손, 발, 때로는 귀까지, 노출된 곳은 음식으로 범벅이 되어있었고 옷은 물론 의자 밑에도 음식들이 떨어져 있었다. 아직은 보충수유를 해주어야 할 때라 치우지 않은 상태로 수유를 이어서 할 때도 있었고 음식이 묻은 곳들을 물로 씻기고 옷을 갈아입힌 후 수유를 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하루 2번 이유식을 먹인 후엔 당이 떨어져 밤에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고 야식을 시켜 먹고 있는 내가 있었다.

부랴부랴 옷 전체를 덮어주는 이유식 턱받이를 주문하고 자기 주도 이유식 매트도 구입했다. 아는 동생 말로는 이유식을 할 때 횟집 비닐을 쓴다는데 저마다 노하우가 있나 보다.


가장 예쁜 재료를 고르고 식기, 냄비, 칼 등을 아주 깨끗이 세척하고 때때로 열탕 소독도 하며, 아주 정성스레 칼질을 하고 알맞은 시간으로 찌고, 다진 후 먹이는 한입, 그리고 두 입, 그렇게 완밥.


이유식 숟가락에 적당량의 이유식을 담아 율이 입 쪽으로 숟가락을 가져다주면 아기 새처럼 벌리는 율 아가. 숟가락을 잡고 싶어 하는 율이를 위해 손에 쥐어주고 다른 숟가락으로 이유식을 떠서 입술 쪽으로 향하면 쥐고 있던 숟가락은 던지고 입을 내밀어서 먹는 율 아가. 이유식 13일째, 율이와 내가 교감하며 이유식 호흡을 맞춰가고 있다.


이유식 공부를 토대로 식단 구성부터 재료 선택, 재료 손질, 먹이기, 치우기까지 일련의 과정들. 특히나 새로운 재료를 준비할 때면 얼른 맛 보여주고 싶다는 기대감에 이유식 시간을 기다리게 되기도 하지만 치우기만큼은 이 과정에서 빼고 싶다 생각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마주하는 명확한 마음은, 아기 새처럼 입을 벌리고 있는 율이가 고맙고 다 먹은 숟가락을 던지며 더 달라는 신호를 보낼 때면, 힘이 솟아나며 새롭게 마주하는 우리의 호흡이 기쁘다는 것이다.


범보 의자에 앉아 나를 바라보는 율이를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율이는 이 순간을 기억하고 싶어도 절대 기억할 수 없다는 것. '6개월에 처음 먹은 이유식'. 아무리 끄집어내려고 해도 기억할 수 없는 까마득한 아기 시절의 하루. 이런 생각을 하며 율이를 바라보니 치우는 것은 차치하고 지금 기쁘게 먹이자 싶었다.

율이와의 일상은 정지 버튼 없는 영화와 같기에 기록으로 예쁜 장면을 담아둔다. 이유식을 잘 먹어주는 율이, 이 하나에 이토록 고마운데 시간이 지나면 내 마음속에 이 욕심, 저 욕심이 붙어있을 게 뻔하다. 시간이 흘러, 한 번씩 꺼내보자. 욕심이 커질 때면 더욱이.


20241216.jpg 율이 이유식 시간에 나도 함께 먹는다. 거대한 나와 아주 작은 율이가 대비되는 이 모습을 꼭 담아두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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