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와 까마귀

짧은 이야기

by 윤다서영

폭풍우가 세차게 몰아치던 어느 날, 어린 나무 한 그루가 뽑히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버티고 있다. 폭풍우는 어린 나무에게도 사정을 봐주지 않았고, 어린 나무는 뿌리가 보일 정도로 마구잡이로 흔들렸다. 힘에 겨운 어린 나무는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폭풍우를 이겨낼 수 없어.' 어린 나무는 버티던 힘을 스르르 내려놓았다. 그 순간, 포근하지만 강력한 힘이 어린 나무를 감싸 안았다. “아가, 포기하면 안 돼.” 엄마 나무의 목소리였다.


폭풍우가 지나가고 어린 나무는 살았지만, 엄마 나무는 뿌리가 뽑힌 채로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다른 나무들이 말했다. 어떻게 엄마 나무가 어린 나무를 살렸는데 모르겠다고, 바람의 힘을 거스르는 나무는 지금까지 없었다고. 엄마 나무는 바람의 힘을 이겨내고 어린 나무를 살린 것이다. 하지만, 어린 나무는 의구심을 가질 여유조차 없었다. 그저 엄마 나무가 너무 그리웠고, 한편으로는 자신을 버리고 떠난 엄마 나무가 미울 뿐이었다.


세월이 흘러 어린 나무는 어른이 되었다. 그리고 나무에게 새로운 가족이 생겼다. 까마귀 부부 한 쌍이 나무 위에 집을 지은 것이다. 곧 어린 까마귀들이 태어났고, 나무는 까마귀 가족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나무는 까마귀 가족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주고 싶었다. 추운 날은 가능한 많은 나뭇잎을 자라게 해서 까마귀들을 보호했고, 더운 날은 시원한 바람이 까마귀 집 주위에 오래 머물 수 있도록 커다란 잎과 가지로 울타리를 만들어 주었다. 나무와 까마귀는 서서히 한 가족이 되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 아빠. 살려줘요.” 어린 까마귀들의 다급한 지저귐에 낮잠을 즐기던 나무가 화들짝 놀라서 깨어났다. 나무의 시선에 초록 뱀 하나가 까마귀 집 주위를 맴도는 것이 보였다. 나무는 긴장했다. 엄마, 아빠 까마귀가 오늘은 좀 멀리 간다는 말을 들은 터라, 나무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린 까마귀들이 쉴 새 없이 엄마, 아빠를 찾으며 지저귀었다. 나무는 초록 뱀을 떨어내려고 있는 힘껏 움직여봤지만, 오늘은 바람 한 점 없는 화창한 날이었다. 나무는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초록 뱀이 어린 까마귀들에게 다가갈수록 나무는 두려웠다. 그동안 뱀에게 잡아먹히는 작은 동물들을 수없이 보긴 했지만, 까마귀는 가족이었다. 가족을 죽게 할 수는 없었다. 나무는 간절히 바람을 불렀다. 까마귀 엄마, 아빠를 불렀고, 바람의 친구인 구름을 불렀으며, 간절한 마음으로 해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 엄마. 엄마 나무, 도와주세요.


그 순간, 제일 작은 까마귀 하나가 뱀을 피해서 뒷걸음치다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바람에 반해서 움직이는 나무는 없다고 했다. 그리고 바람 없이 움직이는 나무도 없다고 했다. 하지만 나무는 움직였다. 작은 가지 하나를 뻗어서 떨어지는 작은 까마귀를 재빠르게 낚아챘다. 초록 뱀은 갑자기 움직이는 나뭇가지에 놀라서 후다닥 도망쳤다. 나무는 벌벌 떨고 있는 작은 까마귀를 여린 잎으로 감싸 안았다. 그리고 폭풍우 속에서 자신을 구한 엄마 나무를 떠올렸다.


그날 이후, 작은 까마귀는 언제나 나무 주위를 맴돌았다. 나무는 행복했다. 그리고 나무는 작은 까마귀에게 곁에 있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작은 까마귀는 나무의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나무의 곁에서 조잘조잘 떠들었다. 그리고 조금 큰 후에는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들고 온 소식들을 나무에게 전해주었다.


따스한 햇살과 시원한 바람, 그리고 작은 까마귀의 재잘거림까지, 나무는 행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 까마귀가 말했다.

“나무야, 나 가정을 꾸리려고 해. 우리 엄마, 아빠처럼 네 곁에 꾸려도 되지?”

나무는 작은 까마귀에게 해줄 것이 생겼다는 사실에 기뻤다. 그리고 떠나지 않겠다는 작은 까마귀의 말에 진심으로 행복했다. 나무는 작은 까마귀가 가정을 꾸리고 어린 까마귀를 낳는 것을 지켜보았다. 나무는 그 옛날 작은 까마귀에게 했던 것처럼 작은 까마귀의 가족들을 알뜰히 살피고 보살폈다.

“정말 고마워. 나무야.”

작은 까마귀는 언제나 고마움을 표현했고, 나무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좋았다. 평생 이 행복이 이어지기를 바랐다.


하지만, 나무와 까마귀 가족에게 큰 시련이 찾아왔다. 나무가 사는 숲에 벌목꾼의 찾아온 것이다. 동물들이 하나 둘 떠나기 시작했다. 까마귀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작은 까마귀는 떠나지 못하고, 나무 주위만 맴돌았다. 가족들이 어서 떠나자고 재촉하는데도 작은 까마귀는 망설였다. 나무는 작은 까마귀가 자신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간절히 마음으로 작은 까마귀를 향해 외쳤다.

“언제까지나 이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그러자 작은 까마귀가 잠시 날갯짓을 멈추더니, 나무 주위를 크게 한 바퀴 돌고는 가족들과 함께 나무의 곁을 떠났다. 사라지는 작은 까마귀를 나무는 한없이 바라보았다.


벌목꾼은 무자미했다. 작은 까마귀한테는 기다리겠다고 말했지만, 나무는 결국 잘리고, 밑동만 남게 되었다. 작은 까마귀를 한 번만 더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마지막이 다가오자 나무는 작은 까마귀가 보고 싶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볼품없는 모습. 이런 모습을 보여주기는 싫었다. 나무의 의식이 점점 희미해져 갔다. 그런데, 갑자기 밑동 위로 무언가가 툭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나무는 멀어져 가는 의식을 간신히 부여잡았다. 그리고 집중했다.


작은 까마귀?! 작은 까마귀가 밑동 위에 누워있었다. 그런데 조금 이상했다. 작은 까마귀 주위로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왜? 나무는 목 좋아 울었다.

“왜, 왜 그랬어. 왜 날개 짓을 멈췄어.”

작은 까마귀가 속삭였다.

“거짓말쟁이. 기다린다고 했으면서. 내가 날기 시작한 건 다 너 때문이었어. 네가 없으면 나는 날아다닐 이유가 없어.”


나무와 작은 까마귀의 눈물이 나무의 밑동을 촉촉이 적셔갔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후, 그 사이로 작은 잎 하나가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냈다.




나무는 까마귀를 사랑했다.

그러나 지켜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까마귀는 나무를 사랑했다.

그래서 나무가 사라지던 날, 날갯짓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서 지켜보기만 하는 사랑이 더 아플까?

아무것도 원하는 않은 이를 바라보기만 하는 사랑이 더 아플까?


나무는 말했다. “난 불안해. 네가 날 떠날까 봐. 네가 다른 곳에 자리를 잡을까 봐.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까 봐. 그러면 나는 널 잡지 못하겠지. 그래서 불안하고 두려워.”

까마귀는 말했다. “차라리 어딘 가에 살아있다고 생각하면 견딜 수 있어.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줄 알았던 당신이 사라져 버리면, 나는 살아갈 수 없어. 당신은 정말 두려운 게 뭔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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