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알아채기

짧은 이야기

by 윤다서영

"띠리링, 띠리링"

뻐근한 몸을 간신히 움직인 정환이 왼팔을 허우적거리며 알람을 끄기 위해 애를 쓴다. 일주일째 이어지는 새벽녘 퇴근에 정환은 점점 지쳐갔다.

“휴, 오늘은 진짜 쉬고 싶다.”

거울 앞에서 한참을 서 있던 정환이 덥수룩하게 자라 버린 앞머리를 손으로 쓱 넘기며 깊은 한숨을 내쉰다.

퀭한 눈동자와 길게 내려온 다크 서클, 밤사이 삐죽삐죽 지저분하게 자라난 수염이 30대 초반이 맞나 싶을 정도로 몰골이 말이 아니다.


시리얼이 담긴 그릇에 기계적인 동작으로 우유를 붓던 정환은 사방팔방 튀어가는 하얀 우유의 잔해들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잔해들이 떨어진 곳에는 이미 뻣뻣하게 굳어버린 지저분한 우유의 흔적들이 턱 하니 자리 잡았다. 정환이 왼손의 손가락을 움직여 하얗게 굳어버린 우유 찌꺼기를 쓱쓱 문질렀다. 지우개처럼 밀려 나오는 꼬질꼬질한 덩어리들을 검지와 엄지 사이에서 돌돌 말아가면서 우걱우걱 시리얼을 입속으로 밀어 넣는다.

"와그작, 와그작"

정환은 큰 입을 양옆으로 부지런히 움직여서 시리얼을 넘기기 좋게 잘게 부수고는 목구멍으로 꼴깍꼴깍 밀어 넣었다. 한번, 두 번, 수십 번의 반복된 행동으로 한 그릇 후다닥 해치운 정환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난다.


"띠링, 띠링"

“또 왔나 보네?”

몇 주 전 우연히 가입한 카페에서 온 문자를 확인하며, 정환이 무미건조하게 말을 뱉었다.

“감정 알아채기? 이건 또 뭐야?”

소파 위에 널브러져 있던 재킷을 잡아채듯 들면서도 정환은 휴대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매일 오는 문자였는데, 오늘의 주제는 유난히 호기심이 돋은 것이다.


"우리 오늘은 '감정 알아채기' 한번 해보시겠어요?

매 순간순간, 우리는 자신도 인지하지 못한 채 수많은 감정 속에 파묻혀 살아가고 있잖아요.

얼마 전 더는 살아가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는 분을 만난 적이 있어요. 그래서 그분께 이 방법을 알려 드렸습니다. 살아갈 이유가 없는데, 두려울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방법은 간단합니다.

지금부터 매 순간 자신의 감정을 인지하고는 덤덤하고, 빠르게 입 밖으로 내뱉으면 되는 겁니다. 조용히 사라지게 두지 말고 꼭 입 밖으로 내뱉어서 매 순간 감정이 자신의 곁에 존재하고 있음을 알아채야 합니다. 소리 내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잠시 머릿속에 두었다가 나중에 꺼내시면 됩니다. 어때요? 오늘 하루 한 번 도전해 보시겠습니까?"


“뭐야, 이게?”

정환이 황당한 듯 피식 웃었다. 그런데 '살아갈 이유가 없는데, 두려울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라는 문구가 정환의 뇌리에 박혀 떠나지 않는다. 요 며칠 정환의 주위를 내내 맴돌고 있던 것이 바로 ‘삶과 죽음’이었던 것이다.

“음, 비웃음.”

정환이 조심스럽게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현재의 감정상태를 내뱉었다.

“나, 이 문자 비웃고 있구나.”

비웃음이란 단어를 내뱉는 순간, 갑자기 문자를 쓴 잘 알지 못하는 이를 비웃었다는 사실에 슬며시 죄책감이 생겨났다.

“죄책감.”

정환이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다. 그런데 그 순간, 스스로 자책하는 감정이 눈 녹듯이 사라져 갔다.

“어라? 신기하네.”

그 이후, 정환은 “귀찮음, 괴로움, 짜증, 화남, 거만, 소외, 질투” 등등 회사 안에서 종일 떠오르는 감정을 웅얼거리고 다녔다.

“생각보다 재미있네, 이거,”


새벽녘 다시 집으로 돌아온 정환은 나갈 때 와는 완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정환이 방으로 향하다 싱크대에 쌓여 있는 지저분한 설거지거리에 시선을 옮겼다. 평상 시라면 귀찮아서 그냥 무시하고 들어갔을 텐데, 오늘은 왠지 설거지를 하고 싶었다.

“역시, 신기해.”

덜거덕, 덜거덕 설거지를 마친 정환이 자기 직전, 바빠서 확인하지 못했던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문자가 와 있었네.”

저녁 7시쯤, 아침에 문자를 보냈던 카페지기가 또다시 문자를 보낸 것이다.


"어떠셨나요? 해보셨나요? 생각보다 재미있었죠?

그런데 혹시 여러분 중에 사랑, 이해, 연민, 행복, 기쁨, 행복, 편안 등을 읊조리셨던 분이 계셨나요?"


“뭐?”

정환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침 회의가 너무 길어져서 짜증이란 단어를 내뱉었고, 같은 말을 무한 반복하는 상사 때문에 스트레스라는 단어를 달고 지냈다. 그리고 몇몇 동료가 자신만 두고 담배 피우러 나간 사실을 알고는 소외란 단어를 내뱉었으며, 그 외에도 귀찮다, 화가 난다, 우울하다, 등 안 좋은 감정만 웅얼거렸다.


"만약 없으셨다면, 내일 다시 한번 도전해 볼까요? 이번에는 의식적으로 이해, 연민, 기쁨, 행복, 편안, 사랑 등을 떠올려 보는 겁니다. 하루에 한 번이라도 좋습니다. 길가에 핀 이름 모를 꽃들을 보고 떠올려도 좋습니다. 우연히 바라본 하늘을 향해 중얼거려도 괜찮습니다. 한번 해보시겠어요? 찡긋."


찡긋 윙크하는 이모티콘을 보는데 정환은 뭔가에 얻어맞은 듯 멍해졌다.

“이 사람 아무도 긍정적인 감정을 꺼내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 아니야?”

정환은 온종일 부정적인 감정만 내뱉은 자신을 떠올리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내가 이렇게나 부정적인 사람이었다니. 음, 내일부터 문자에 나온 단어들을 하나씩 내뱉어 볼까? 그런데 그 말들을 내뱉을 일들이 생기려나? 아, 의심.”

또다시 떠오른 부정적인 감정에 정환이 혀를 내두른다.


“밑져야 본전인데, 그래 어디 한번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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