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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생회복지원금

달음박질해서 가고 싶은 곳

by 박수경

13. 아무것도 하지 않기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갖기.

여섯 명을 낳는 동안, 정말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는지 쉬는 시간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는 걸 알았다.


잠을 자는 것도 아닌데, 멍하니 있기.

하물며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것도 하지 않기.

정말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을 가지기.


그런 시간이 조금씩 늘어날수록

내가 건강해지는 걸 느낀다.


기억하지 않기.

시간과 함께 같이 소멸되기.

나를 잃어버리기.


참 좋은 시간이구나.

그걸 왜 여태 몰랐을까?


앞으로는 너무 열심히 살지 않기로 한다.


14. 구름


땀 뻘뻘 흘리며 밥을 차렸다. 주말이라 하루 온종일 누워 티비보던 남편이


막걸리 한 병 사다 달라는 주문에 밥을 차리고도 부리나케 막걸리 사서 집 들어가는데 구름이 예뻐서 사진을 찍었다. ^^~

뭘 해 달라면 좋은 거구나 안 뒤로는 나도 가끔 남편에게 물 떠달라 뭐 사달라 심부름을 시킨다. 심부름하는 거 생각보다 좋다.


중전마마로 살고 싶은데 나도 참, 실제 삶은 무수리 같다.

끙.


내가 주부로 해야 할 일만 해도 우리 집은 매우 안전해지고

대부분의 가족들 구성원 모두 느긋하고 여유롭고 심지어 행복하다고들 말하는데...


나는, 정작 좋은가 생각해 보면 일할 때는 진짜 힘들어 죽겠는데, 어제 같은 경우도 예배드리고 와서 세 시간 넘게 소파에도 침대에도 앉지 않았구나, 왜 이렇게 힘들지 생각해 보니, 그랬더라고. 뭐 세 시간 넘게 앉지 못하고 집안일하는 게 대수야 싶다가도 가끔 이러다 큰일 나겠다 싶을 때 쉬어줘야 한다.


모든 일을 마치면 그때 평화가 임하긴 한다. 평화 없이 쉬는 방법도 있긴 하나, 그건 늘 찜찜 그 자체 폭염보다 더 지친다. 쉼과 일 균형은 언제 찾을까?


민생회복지원금이 오늘부터 신청하면 지급된다고 한다.

대식구라 한 여름 무더위를 식혀줄 소나기처럼 반갑다.


15. 노키즈존


목이 부어 열이 나 학교를 쉬게 된, 아이랑 집에서 가까운 카페를 검색해 차로 약 20분 거리를 드라이브하듯 카페 시소라는 곳에 다녀왔다. 방학 이틀 앞두고 결석! 주일부터 열이 나서 소아과 가서 약 받아먹었더니 차차 좋아졌다.


출산하느라 멀리 가 본 적이 없는 내가 수요 성경공부로 양평 <수>라는 곳은 호수가 드넓게 펼쳐진 정말 신기할 정도로 근사했던 첫 번째 카페였다. 이곳은 집에서 가까운데 갤러리가 있다고 해서 들러 봤는데 도자기만 있을 뿐, 그림 전시는 아니라 아쉬웠다. 건물 한 통을 통째로 쓰는 곳이었다.


4층은 온통 카페

3층은 전시장과 카페

2층은 대형 스크린에 음악을 들으며 주문한 차를 마실 수 있게 준비해 두었는데 아이들과 함께는 불가라 해서 구경만 잠시 하고 왔다. 14개월 된 막둥이가 어린이집 가면 오후 3시 30분에 오니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졌다. 내 의지만 있다면 가까운 바닷가도 다녀올 수 있다.


여름방학은 내일이고, 온전히 혼자서 쉴 수 있는 날은 이제 오늘 딱 하루인데 무엇을 하면 좋을까 싶어진다.

어딜 가지 않아도 요즘에는 크게 영향이 없긴 하다.

다녀오면 피곤한 게 가는 것보다 문제다. 장마 이후 다시 무더워진 뒤로는 책 읽는 조용한 곳만 찾게 된다. 얘들 방학이 수요일부터니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체력이 좋아야 어디든 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어제 간, 카페에 낯익은 사자와 어린양에서 출간한 지거 쾨더 그림이 액자로 놓여 있어서 근사했고 조금 놀랐다. ^^~시몬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림은 새로운 해석을 하게 된다.


요즘에는 노키즈존이 점점 많아진다. 출산율도 하락하면서 아이들 세상이 점점 좁아지는데 참 안타깝다. 아이들의 호기심을 너그러이 바라봐 주는 어른들이 많으면 좋을 텐데! 배제된다는 건 참 거부당하는 것 같아 마음이 씁쓸하다.


16. 좋은 하루


새벽에 일어난다. 일어날 때 곧바로 일어나기보다 눈을 감고, 자기 연민으로 일어난 불쾌한 감정을 수용하고,

“괜찮아. " "좋은 하루가 되게 해 주세요.”

내가 믿는 신에게 기도한다.


나에게 좋은 하루는,

그 무엇도 아닌 나 자신과 잘 지내는 것!


잠드는 아기 옆에 더 깊은 잠을 자라고 토닥이는 엄마의 손길처럼,

나 스스로에게 무한 응원을 해 보는 새벽은 신의 은총이 깃든 시간이다.


『바움가트너』 초입 부분을 읽었다. 『빵 굽는 타자기』를 쓴 폴 오스터 작품이다.

글쓰기의 모든 것이라 할 만큼 작가의 글은 흡인력이 있었다.


주인공은 냄비를 태우고, 뜨거워진 냄비를 손으로 만지는 실수를 저지르며 시작되는데,

냄비를 손으로 만지는 그 시간에 전화를 걸기로 한 그녀가 아닌 낯선 남자의 목소리 전기 검침원으로부터 전화가 온다.

흐르는 차가운 물에 덴 손의 화기를 빼면서, 글은 상황 묘사가 그 장면을 영화처럼 연상되듯 또렷하다.


이 책을 읽기 전, ‘아는 것을 쓰지 말고, 본 것을 쓰라’는 글 쓰는 방법에 대해 며칠 전 읽었던 터라 지식이 많은 것이 중요하기보다 본 것을 얼마나 글로 그려내느냐가 글쓰기의 본질임을 알았다.


어제 본 것은 무엇일까. 본 것을 쓰는 게 참 어렵구나, 깨닫는다.


내가 본 것은 두 개의 커다란 구름이었다.

피곤해서 잠시 잠든 나는 시간에 늦을세라 바쁘게 학교 하교하는 아이를 데리러 낮 3시 10분에 갔는데,

구름이 두둥실 맑게 산책 나온 듯 하늘이랑 놀고 있었다는 것이다.


난데없이 구름이랑 나도 놀고 싶을 만큼, 땡볕의 더위와는 어울리지 않게 청량했다.


아이를 다시 미술학원 데려다주면서,

'조금 더 다정하게' 말하기로 다짐하며

"빵이라도 먹고 갈래?”

물으니 미술학원이 좋은 아이는 계단으로 신속하게 달아나 버렸다.


아, 나도 좋아하는 곳으로 하고 싶은 것으로 달아나고 싶다. 아이처럼.


달아나고 싶은 날이 요즘 많은 나,

나의 달음박질은 글쓰기라 참으로 안전하다.






17. 민생회복지원금

부모가 맞벌이라 방학이지만 집에 본인들 혼자만 있는

넷째(4학년) 친구들 3명을 픽업해 키즈카페에 데려왔다. 얼마 전 출간한 황정은 에세이 작은 일기를 들고 갔다. 지난 시간 우리가 얼마나 울화통이 쌓였었는지

황정은이 시작하는 그날의 울분과 불안을 기록한 12월 3일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때 광장에 나와 탄핵을 외치던 이들을 응원하며 익명의 사람들이 커피값을 미리 결제했다고 한다. 나는 고작, 아이들 데리고 키즈카페에 왔고, 5명을 계산하니 7만 원이 훌쩍 넘는다. 괜찮다. 민생회복지원금, 이럴 때 써보는 거지^^ 억눌렸던 경기 침체가 방방이에서 아이들

폴짝폴짝 뛰 듯 모두 경기회복이 되길 바란다.


얘들아 너희 부모님께 친구 덕에 에어컨 빵빵한 실내 놀이터에서 방방 뛰어놀아 좋았다고 하거라

그것도 친구 부모님이 모두 계산했다고 꼭 이야기하렴 ^^ 날이 더운데 땡볕에 야외 설치된 수영장에서 놀다 더위 먹어 자기가 좋아하는 축구도 못 간 넷째가 모처럼 시원한 놀이터에서 친구들 앞에 어깨가 들썩거린다.


집에 돌아가는 아이들 아이스크림도 하나씩 먹여 보냈다. 참 각박한 세상에 작은 착한 일에 나도 기분이 좋다.


19. 식탁


아침 일찍 일 나가는 남편이 라면 끓여

달래서 끓여서 그릇에 담고 열무김치 꺼내고, 숟가락 젓가락을 라면 그릇 옆에 곱게 놓고 얼른 먹으라며 식탁에 앉혔다.

앉자마자 일어나는 남편에게 왜? 뭐 더 줘

라니 주섬주섬 다시 무얼 챙긴다.

"아기젓가락이네."

길이가 매우 짧은 아기젓가락을 올려둔 나


요즘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나 혼자 피식 웃음이 나온다.




짧지만 아찔한 여름방학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무것도 쓰지 않으면 고칠 수 없다. 매주 금요일 발행인데 하루가 늦어졌네요. 사과의 말씀 올려드립니다.

더위가 기승을 부립니다. 모두 건강 유의하시기 바랄게요. 육 남매 엄마의 삶과 여름방학 가운데 우리 아이들과 함께 즐거운 일 가득하길 응원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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