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 간호사. 진상 보호자로 변신.
스테이션에는 마침 나이 많아 보이는 간호사 선생님(보자마자 이 사람이다! 싶었다.)과,
어제 남편에게 핀잔을 들었던 챠지 간호사 R이 있었다.
(나는 사실 친구에게 이 여자에 대한 소문을 들어 이 분을 알고 있었다........)
“무슨 일이시죠?”
나이 많은 간호사 선생님이 물으셨다.
머리가 짧고, 키가 멀쑥이 크고, 나이가 많고.. 아.. 이 사람이 맞다...
그런데 이 사람이 정말 내 가족에게 미운털 박히는 말을 했던 사람이 맞나..
그러기에는 인상은 그렇게 안 생기셨는데... ㅜㅜ 생각하며
나는 차분히 힘주어 또박또박 말했다.
“어제 제 남편에게 마스크 추켜 올리라고 말씀하시고,
바지 올려 입으시라고 사람들 앞에서 크게 말씀하셨다면서요.
검사도 내려갔다간 그대로 올려 보내셨다고 하던데 선생님이 그렇게 지시하신 게 맞나요?
머리 짧은 간호사 선생님이시라고 하시던데요.”
“아.. 제가 말씀드린 게 맞지만.. 환자분이 기분이 많이 상하셨다고요?
저는 좋게 말씀드렸는데..”
그런데 갑자기 옆에서 챠지 간호사 R이 끼어들었다. (아니 이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아니 어제 방도 다 옮겨드리고 했는데. 왜 뭐가 문제세요.
제가 어제 J랑 통화도 했거든요. 뭐 여러 가지 대충 들어서 알고 있긴 한데 뭐가 대체 기분이 나쁘신지.”
아니. 치사하게 친구 이름을 꺼내다니..?
나는 떨렸던 마음이 슬슬 가라앉았다.
내 친구의 선임이라고 해서 내 선임은 아니지 않은가?
아니 그리고 나도 병원비 내고 병원 생활하는 환자가족인데.
내가 왜 간호사 입장을 생각하면서 눈치 보고 이래야 하지? 심지어 내 병원도 아닌데.
나는 나도 모르게 전투태세가 갖춰지기 시작했다.
“선생님. 제가 지금 기분 나쁜 건 단순히 방 옮겨서 기분 나쁜 거 아닌데요.
여기는 무슨 검사를 진행할 때 설명 먼저 안 해주시나요?
그리고, 제 남편이 왜 여기 올라와서 굳이 코로나 검사해야 하죠? 열도 다 떨어진 상태인데.
응급실에서 하고 올라왔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또 한다 쳐도, 인턴 선생님이 코로나 검사할 때, 환자 프라이버시를 지키지도 않고, 설명도 안 하고 검사 진행한 건 알고 계세요?”
(......라고 똑바로 멋지게 말하고 싶었으나 아마 이내용을 웅얼거리면서 말했던 것 같다 ㅠㅠ 흐엉 바보ㅠㅠ)
나이 든 간호사 선생님 H는 여기서 챠지 간호사 R을 제지하며 다시 말을 이어가셨다.
“죄송합니다 보호자분, 혹시 저에 대해서는 어떤 부분이 기분이 안 좋으셨을까요? 저는 응대를 그렇게 하지 않은 것 같거든요...”
“선생님. 선생님이 하지 않으셨다고 하면 다인가요? 감정이라는 건 받아들이는 사람 마음인데요.
그럼 제 남편하고 동생은, 선생님이 친절하게 말씀하셨는데 마냥 기분이 나빠했다는 건가요?”
“ 그렇죠.. 맞는 말이죠... 보호자분.. 보시다시피 제가 나이가 많고, (눈밑의 주름이 한층 깊어 보였다..)
제가 저만한 아들이 있어요.. 또 젊은 분이고 그래서, 제가 말을 아무래도 저도 모르게 편하게 한 것 같네요....
그래서 기분 안 좋게 들으신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럼 보호자분, (여기서 작게 한숨을 쉬셨다) 제가 이제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제가 지금 가서 환자분과 동생분께 배우자분께 얘기를 들었는데, 화나셨다고 들었다 하며 사과하면 될까요?”
“선생님. 아시다시피 저도 간호사였어요. (챠지 간호사 R은 어제 남편에게 지적을 받고는 전체 인계로 돌렸다고 했다.)
저는 문제가 커지는걸 진짜 원하지 않아요. 그리고 바쁘셨을 거라고 생각하고요.
남편은 지금 인턴 선생님과 선생님에게 화가 많이 나있어요.
제가 말해서 사과한다고 말하시는 건 진짜 더 원하지 않고요.. 사과해주시되 자연스러웠으면 하는데..”
“아니 남편분이 진짜 예민하시네.” 챠지 간호사 R은 조용히 중얼거렸지만
나는 하고 싶은 말을 다했기에 그냥 못들 은척 했다...
나이 든 간호사 선생님 H는 챠지 간호사 R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 이게 우리 일까지 같이 엮이면 안 돼. 우리는 일단 빠져나와야지 얼른 해결 방법을 생각해보자”
(여기는 간호사와 의사 사이가 별로 좋지 않다고 들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체온계 가지고 들어가시던지, 뭐 자연스럽게 가셔서 사과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내가 대체 뭐 하고 있는 건가.
한 편의 블랙코미디 같다는 생각도 들면서 나는 현타가 왔다.............................
휴게실로 들어가 정수기에 물을 따라 마시면서- 나는 내가 한 일이 잘한 건가.............
전직 간호사와 보호자의 경계에 아주 괴로워하는 나 자신을 보고 나는 한숨을 쉬어댔다....... 에휴..
(술이나 퍼먹고 싶다고 생각했다)
잠시 후 (굉장히 환한 얼굴로) 체온계를 잡아준 선생님이 나를 찾아왔다.
“생각보다 잘 끝났어요! 남편분 아주 쿨하시던데요?”
“네? 뭐라고 하셨는데요?”
“솔직하게- 어제 그렇게 말씀드려서 기분이 안 좋으셨을 것 같아 죄송하다고 말씀드리려고 왔다,
몸은 어떠시냐 하면서 말씀을 드렸죠. 그러고 나서 제가 이런 거 간호사 교육시키는 사람인데
참 죄송하네요 라고 말씀을 드렸어요.
그랬더니 남편분은 점잖게, 사과주셔서 감사하다, 솔직히 퇴원하면서 이런 부분들 모두 말씀드리려 했다.
그리고 좋게 웃으면서 마무리했어요.”
“아.. 다행이네요...”
“보호자 분도 고생 많으셨어요.”
뭐 어쩌고 고생하셨다 그런 얘기 주고받으면서 환하게 마무리했던 것 같다.
이렇게 쉽게 끝나다니!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고..
나쁜 분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뭔-가 석연치 않게 찝찝한 느낌은 어쩔 수 없다;
이제 뭐하는 짓이냐.. 에휴..
나는 뭔가 지친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병실에 들어가니 남편은 누워서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한참 다른 얘기를 주고받다간 남편은 아무렇지 않게 얘기를 꺼냈다.
“어제 처남하고 나한테 뭐라고 했던 간호사가 나한테 사과하러 왔다?”
“아 진짜? 뭐래?” (나는 슬쩍 눈치를 봤다)
“뭐 미안하대. 먼저 사과해주니 고맙지”
“그럼 이제 인턴한테만 뭐라고 할 일만 남았네?”
“에이.. 다 의료진이 한 팀 아니야? 뭐 사과받았으니까 됐지 뭐.. 됐어. 얼른 나아서 퇴원하자. 나 다 나은 거 같은데.”
나는 맥이 풀렸다. 그래그래. 좋은 게 좋은 거지.... 좋은 게 좋은 거다....
>>> 입원한 지 4일째.
어떤 소문(?)이 돌아서 그런 건지, 일이 많이 바빠서 그런 건지 담당 간호사들은 우리에게 필요한 말 이외에는 하지 않았다.
(더구나 나는 특히 챠지 간호사 R이 그냥 얄밉고 미웠다. 그녀는 그 일 이후로 스테이션 앞을 지나다닐 때마다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물론 나도 그랬고.)
하지만 뭐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나이 든 간호사 H선생님과는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다소 어색하지만 따뜻한 눈인사를 주고받았다.
친구 J와 절친이었다는 S선생님도 조용조용히 살갑게 나를 챙겨주곤 했다.
내가 겪었던 일을 함께 분개해주며, 아유 마음 어려웠겠노라고 친구 J 를 통해서 위로의 말도 전해주고,
보호자 침대에서 며칠간 침상 생활하면 몸이 아플 수도 있을 텐데, 건강 잘 챙기셨으면 좋겠다의 따뜻한 한마디도.
(심지어 옆에 기계를 달고 있는 환자가 있었다.)
소음이 신경 쓰일 텐데 이거라도 도움되었으면 좋겠다며 일회용 귀마개를 손에 쥐어주기도 하셨다.
나는 음? 이분은 천사인가?라는 생각도;;;
그렇게 보면 바빠서 누군가에게 다정한 말 한마디를 못해준다는 말은 핑계가 아닐까라는 생각마저 들기도 했다.
배려란, 대단한 게 아닐 텐데라는 생각도 들고.
(나는 어땠나, 새삼 만나왔던 환자들에게 반성하는 마음도 들고;;)
>>> 입원한 지 5일째
잠깐 집에서 씻고 병원으로 돌아오니 남편 침대가 병실에 없었다.
몸이 좋아졌는지 확인하는 척수액 검사를 오늘 할 거라고 얘기를 듣긴 했지만, 보호자한테 연락도 없이 이렇게 숑 들어가 버리다니 조금 놀랐다.
아.. 마침 스테이션에 그 미운 챠지 간호사 R이 앉아있었다. (아니 이 여자는 왜 맨날 일하는 거야... 불편하게..)
나는 “지금 남편 척수 검사하러 들어갔나요?”라고 ‘그냥’ 물었다. (아니 물어볼 수도 있잖아;; 자리에 없으니)
R은 갑자기 일어나서 처치실을 스윽 보더니 “네. 얘기 못, 들, 으, 셨, 어, 요?” 하고 대답하더니
“동의서 받은 거 맞지?!!!!!”라고 (나 들으라고?) 안에 있는 담당 간호사에게 큰소리로 물었다.
(갑자기 나는 기분이 졸라 나빠졌다)
그리고는
“동의서 환자분한테 받으셨다던데요”라고 당당히 나에게 대답했다.
나는 황당하기도 하고 맥도 풀렸다.
아니.. 내가 동의서 받았냐고 물어본 것도 아니고.. 남편 검사 들어갔냐고 물었을 뿐인데...
대차게 나도 들이받을까 생각하다가.. 에이 말자.. 이제 퇴원이 눈앞인데..
남편의 인상에 겁을 많이 먹었었나.. 뭐가 무서운 건가..? 뭐 이런 생각도 들었다.
.
남편의 수치는 처음 입원 왔을 때보다는 많이 나아졌다고 했다.
염증 수치가 0은 아니지만 퇴원을 해도 좋은 정도이니 퇴원을 하라고 했다.
레지던트는 간호사에게 귀띔을 들어 우리가 인턴에게 화가 나있다는 걸 알고 있었는 모양인지,
우리에게 아-주 친절했다.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말을 들었다;; 우리에게 보이는 친절에 간호사들이 놀랐다는 후문;;)
나는 뭔가 불안했다.
남편은 거의 약 한 달간 두통으로 너무 아파했다.
물론 구토와 발열을 동반한 괴로움은 다소 최근이었지만.. 이렇게 2-3일 안에 낫는다고?? 좀 뭔가 석연치 않았다.
(퇴물 간호사의 촉이랄까..)
심지어 이곳에서 항바이러스제를 투여받거나 한 것도 아니었고.. 진통제만 맞았다.
사실 뇌수막염 자체는 뇌가 앓는 감기 같은 거고 이 정도 임상수 치로 약을 쓰지 않기도 한다고 한다..
그래도 뭔가 불안한 마음에..
퇴원하고 싶어 난리난리 하는 남편을 구슬리고 구슬려 (빌고 빌어;;)
하루만 더 입원을 하자고 했다..... (남편은 입이 삐-쭉 나왔다.)
그날 밤도 여느 날과 다르지 않았다.
나는 신경과에서 일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이 나름대로의 바쁘고, 힘듦을 공기로 느끼곤 했다.
밤만 되면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몇몇의 환자들
해맑게 콧줄이 빠졌다며. 웃으며 콧줄을 들고 나오는 한 간병인..
그래 너희도 힘들겠지. 갑자기 여기서 일하는 모든 간호사들이 측은히 느껴졌다.
2년 차라는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간호사들을 보며, 힘내라고 마음속으로 응원해주었다.
(내가 만났던 나의 신규들을 떠올렸다.)
사실 나는 내가 보호자임에도 내가 일하는 기분이 들었다. 마냥 나도 퇴근하고 싶었다... 그래.. 내일 퇴근이다 드디어.....
>>> 입원한 지 6일째
오늘은 드디어 퇴원한다.!!!!!!
심지어 오늘은 남편의 생일이었다.
환자 밥에 ‘생일’이라고 적힌 쪽지가 곁들어있었다.
남편은 미역국을 한두 입 떠먹고는 수저를 내려놓았다. 집에 가자고.
(뭐 며칠간도 많이 먹지 않기는 했다)
그래, 가자, 가! 어쨌거나 나아서 집에 가긴 가는구나 생각이 들었고.
우리는 그렇게 B병원과의 인연을 마무리했다.
다신 아프지 말자!
서로 장난치며, 우리는 그리웠던 집으로 일주일 만에 돌아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