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몬드
우리는 비행기 결항을 알리는 단어가 일렬로 이어지는 전광판 앞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아침부터 비바람이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이렇게 되어버렸다.
타이베이를 떠나는 날 아침이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에 잿빛 먹구름이 가득 덮여 있었고, 가로수는 바람에 흔들리며 불안하게 휘청거렸다.
D는 파인애플빵이 맛있으니까 꼭 사서 가자고 자못 명랑하게 말했다. 그는 앞장서서 비바람을 뚫으며 가게를 찾았고 양손에 빵이 담긴 봉투를 들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D와 난, 온몸이 무겁게 젖어 있었다. 공항에 도착해서야 타이베이공항에 있는 모든 비행기의 출발이 지연되고 있음을 알았다. 출발 예정 시각이 다가오면서 점점 초조해졌다.
내일 출발한대. D는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기상 악화로 비행기 출발 시각이 내일로 변경되었다는 영어 문장이 D의 휴대폰 화면을 가득 채웠다.
타이베이 전역을 강타하는 태풍이었다. 비바람이 더 거세지기 전에 숙소를 찾아야 했기에 시내로 돌아가는 버스를 탔다. 바람이 강하게 몰아칠 때마다 버스가 바람이 부는 쪽으로 진동했고, 버스 안에는 불안한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D의 얼굴이 금세 수척해졌다. 이번 여행에서 D는 길눈이 어두운 날 대신하여, 거의 모든 길을 앞장서서 안내했다.
내가 길을 찾을게. D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D의 앞으로 자리를 옮겨 선 순간, 그를 지키고 싶다는 마음이 강렬하게 솟았다. 늘 이런 마음으로 내 앞에 섰던 걸까. 미지의 공간에서 누군가의 앞에 선다는 건, 내가 더 많은 힘을 들이더라도 괜찮다는, 그를 지키고 싶다는 의지였다.
손원평 작가의 책 ‘아몬드’에서 읽었던 한 장면이 떠올랐다. 감정을 배워야 하는 윤재의 곁에 나란히 서서 걸었던 외할머니와 어머니, 그들은 호기심 섞인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에서 윤재를 보호했다.
가끔은 아파서 내가 슬며시 힘을 뺄 때면 엄마는 눈을 흘기며 얼른 꽉 잡으라고 했다. 우린 가족이니까 손을 잡고 걸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반대쪽 손은 할멈에게 쥐여 있었다. 나는 누구에게서도 버려진 적이 없다. 내 머리는 형편없었지만 내 영혼마저 타락하지 않은 건 양쪽에서 내 손을 맞잡은 두 손의 온기 덕이었다.
- 손원평, 아몬드, 2018, 창비, p.153
윤재의 손을 놓지 않고 지켜낸 그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닮고 싶었다.
D는 더듬더듬 길을 찾아 나서는 내 뒤를 조용히 따라왔다. 겨우 숙소에 도착해서 체크인하고 나서야, 우린 긴장을 풀고 편히 앉을 수 있었다.
그때 말이야, D가 살며시 내 옆에 와서 말했다. 길을 못 찾는 네가 우리를 위해서 열심히 길을 찾는 모습을 보니까 신기하게 힘이 나더라고.
바람이 세차게 건물을 때려서 걱정을 하며 잠을 청했다. 그래도 내 옆에 D가, D 옆에 내가 있었다. 힘이 든 상대를 대신해서 앞장서기도 나란히 서기도 하며 간다면, 결국 우린 무엇이든 함께 해낼 수 있을 거라는 단단해진 마음으로, 그 밤 서로를 지켜내며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