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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소이 Apr 18. 2024

마티네의 시간, 빈에서

-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빈 Hietzing역에서 내렸을 땐 늦은 오후였다. 오페라하우스로 향하는 길, 섬세한 공예가가 조각한 듯한 건물과 거리에 시선이 뺏겼다. 오페라하우스에 도착하니, 공연이 곧 시작되려는 듯, 드레스와 턱시도를 차려입은 사람들이 공연장에 들어가고 있었다. 우린 그들을 신기하게 바라보며 또다시 시선이 뺏겼다.      


 오늘 공연 예매는 마감입니다, 다음날 공연이 또 있어요, 아쉬워하는 D와 나에게 직원이 나지막이 대답했다.     

 오페라하우스 밖으로 나오니 전면에 전광판이 보였다. 전광판 앞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우리처럼 서 있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지금 시작할 공연의 준비 상황을 보여주는 화면에 닿아 있었다.   

  

 이 도시에서 예술은 공기 같았다. 길에서 지나가다가 혹은 가만히 멈춰 서서 자연스레 공연을 보고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난 그 도시의 사람들이 부러웠다.    

 

 다음날 오전, 오페라하우스에서 빈 필하모닉 마티네 공연을 봤다. 좌석이 정해지지 않은, 가벼운 복장으로 들을 수 있는 소규모 공연이었다.      


 바이올린 연주자가 중간에 재치 있는 연주로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연주를 듣는 관객들의 얼굴에 따스한 미소가 감돌았다.      


 손을 맞잡은 커플, 어깨를 맞댄 노년의 자매,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싱긋 웃는 D와 나도, 이 순간만큼은 하나의 멜로디로 이어져서 서로의 감동을 공유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음악을 듣고 있는 그 시간이 근사하게 느껴졌다.      


 정세랑 작가의 여행 에세이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에서, 그는 해양생물관의 거대한 고래 밑에 누워 순간의 경이를 인식한 경험을 이야기한다.  

    

사람들이 그 고래 아래, 시원한 돌바닥에 누워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거기 누워 있으니 30분쯤은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갔다. 지구는 45억 년 되었는데, 이 모든 것은 결국 항성과 행성의 수명이 다하면 아무 흔적도 남지 않을텐데, 우리는 짧은 수명으로 온갖 경이를 목격하다가 가는구나 싶었다. 경이를 경이로 인식할 수만 있어도 아무렇지 않은 것들이 특별해질 것이다. 덧없이 사라진다 해도 완벽하게 근사한 순간들은 분명히 있다. 자연사 박물관에 갔던 날이 나에게 그랬다.

- 정세랑,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2021, 위즈덤하우스, p.74-75     


 그날의 마티네, 전날의 발레 공연은 경이로웠다. 서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멜로디에 맞춰 함께 호흡하고 무용수의 몸짓에 따라 몸의 진동을 느꼈던 순간.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친근함을 느꼈다. 예술이 주는 순수한 아름다움을, 타인과 접점을 이룰 수 있음을 경험한, 경이로운 순간이었다.      


 그날의 마티네 이후로, 순간의 경이를 차곡차곡 모으고 기록하고 싶다는 생각을 줄곧 했었던 것 같다. 나에겐 마티네의 시간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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