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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소이 Apr 25. 2024

끝없는 대화 속으로, 단수이에서

- 디어 랄프 로렌

단수이에 도착했다.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의 촬영지로 유명한 곳이었다. 주인공들이 함께 걷던 길을 따라 걸으며 영화에서 흘러나왔던 피아노 멜로디를 떠올렸다.

     

 샤오위와 상륜이 피아노를 연주하며 마음을 전하는 장면이 기억났다. 피아노 건반에서 튀어 오르는 맑은 음을 연결하여 ‘너와 있으니 좋아, 함께 있으니 즐거워.’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어두운 하늘로 날아가는 검은 새의 무리가 학교 뒤로 날아가는 모습이 머릿속에서 넘실거리는 멜로디와 어우러져 경이로웠다.


 바닷가에 가서 흰 구름과 잿빛 구름이 절반씩 덮고 있는 광활한 하늘과 짙푸른 바다를 바라봤다. D는 쩐주나이차가 먹고 싶다고 했다. 간단한 스낵을 팔고 있는 청년에게 쩐주나이차를 주문했다.  

    

 잘 알아듣지 못한 청년이 다시 물었고, D는 계속 “쩐주나이차, 쩐주나이차”라고 말했다. 미간에 주름을 잡던 청년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익숙지는 않지만, 자신감이 담긴 몸짓으로 쩐주나이차를 만들어줬다.      


 어떻게 알아들은 걸까, 신기한 듯 바라보는 우리에게 청년이 미소 지었다. 우린 활짝 웃으며 달콤한 쩐주나이차를 호로록 마셨다. 서로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서 답답했던 마음이, 시원한 즐거움으로 가득 차올랐다.  

    

 나의 마음이 전달되기를 바라는 순간을 생각하다가 손보미 작가의 ‘디어 랄프 로렌’에 닿았다.

  

 박사과정을 넘기지 못하고 연구실에서 쫓겨난 ‘종수’는 자신의 실패에 괴로워한다. 우연히 고등학교 시절 좋아하던 여자애의 랄프 로렌 컬렉션을 떠올리고 랄프 로렌의 생애를 연구하기로 한다.  

    

 는 랄프 로렌의 생애를 조사하다 어린 랄프 로렌을 돌봐줬던 잭슨 여사를 만난다. 나이 많은 잭슨 여사가 대화 중에 잠이 들 때면, 종수는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던 그의 이야기를, 잠든 잭슨 여사가 듣는다.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사실이 있다. 지금 이 시점에서 돌이켜 생각해보면 굉장히 의아한 일이지만, 잭슨 여사는 한 번도 내가 이야기하는 도중에 깨어나는 법이 없었다. 잭슨 여사는 항상 내 이야기가 일단락이 되면 그때야 눈을 떴고, 이렇게 물었다.
"내가-어디-까지 이-야기 했-더라?"
그리고 잭슨 여사는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의 '대화'는 지속되었다.     

- 손보미, 디어 랄프 로렌, 2018, 문학동네, p.184-185     


 잠든 잭슨 여사는 자신의 소리를 내지 않고 종수의 말을 계속 들어준 것 같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귀로 계속 들어주며 그들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침묵 속에서 D와 쩐주나이차를 한 모금씩 번갈아 마셔가며 파도 소리와 갈매기 소리로 재잘거리는 바다를 바라봤다.


 따로 앉아있지만 끊임없이 무언의 대화를 하고, 무언가공유하는 행동으로 이따금 연결되는 그 순간, 우린 침잠할 것 같은 서로를 잡아주었다.      


그리고 문득, 그때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지아 류가 떠올랐다. 그는 앞으로도 내 집 문을 두드릴까? 그가 그 문을 계속 두드린다 하더라도 이제 거기엔 내가 '없다'. 이제 이 세상에, 이 우주에, 내가 머무는 곳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식으로 내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이제 다시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었다.    

 - 손보미, 디어 랄프 로렌, 2018, 문학동네,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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