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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소이 Apr 28. 2024

빛의 숲과 사소한 안부, 바르셀로나에서(1)

- 빛의 호위

D와 손을 잡고 영롱한 빛의 숲을 거닐고 있는 것 같았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벽면을 채운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마치 나뭇잎을 가득 매단 나무처럼, 천장까지 뻗은 기둥에서 굵은 가지가 뻗어 나가 천장을 떠받치고 있었다. 가지의 끝에서 빛으로 만들어진 나뭇잎들이 빛나고 있었다.      


 나무의 그늘에 누워 빽빽한 나뭇잎 틈으로 하늘을 바라보듯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나도 한 그루의 나무가 된 것처럼 고개를 젖히고 한참을 서 있었다.     


 그때의 황홀경은 조해진 작가의 ‘빛의 호위’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셔터를 누를 때의 감각에 대한 구절이었다.      


권은은 내 기대와 달리 그 카메라를 팔지 않았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녀에게 카메라는 단순히 사진을 찍는 기계장치가 아니라 다른 세계로 이어지는 통로였으니까. 셔터를 누를 때 세상의 모든 구석에서 빛 무더기가 흘러나와 피사체를 감싸주는 그 마술적인 순간을 그녀는 사랑했을 테니까.   

- 조해진, 빛의 호위, 2017, 창비, p.25-26     


누군가 이런 말을 했어. 사람을 살리는 일이야말로 아무도 할 수 없는 위대한 일이라고. 그러니까... 그러니까 내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반장, 네가 준 카메라가 날 이미 살린 적이 있다는 걸 너는 기억할 필요가 있어.

- 조해진, 빛의 호위, 2017, 창비, p.27-28     


 내가 느낀 안온한 감정은 글에서 ‘권은’이 느낀 감정보다 가볍게 느껴졌고 온전히 나만 존재하는 세계였다.      


 '빛의 호위'에서 화자인 '나'가 '권은'에게 후지산 필름카메라를 주고. 그 카메라로 '권은'은 새로운 세계를 보고 사진을 찍을 때마다 다른 세계에 잠시 다녀오는 듯한 황홀감을 느낀다.      


 ‘권은’이 느낀 황홀경을 대하며 타인에게 건네는 호의를 생각했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그저 상대방이 좋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했던 행동이 있었는지 기억을 더듬어갔다.      


 호의를 준 사람은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고, 그저 잘됐으면 좋겠다는 단순하지만 짙은 마음.      


 그토록 사소한 호의가 누군가의 삶에 희망을 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내 삶 속에 담긴, 나를 살렸던 호의가 하나씩 수면 위에서 떠올랐다.     


 그리고 호의를 준다는 건, 내 안에 머물려고 하는 시선을 종종 밖으로 돌려세우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린 잊혀 가는 존재가 되어 각자 외롭게 둥둥 떠다닐 것 같았다.      


 같은 책에 수록된 단편 ‘사물과의 작별’에서 잃어버린 물건, 잃어버린 관계, 잃어버린 시간을, 모든 상실해 가는 것을 생각하며 먹먹해졌다.     


인간이란 구르는 걸 멈추지 않는 한 조금씩 실이 풀려나갈 수밖에 없는 실타래 같은 게 아닐까. 그때 고모는 그런 생각에 잠겨 있었다고 했다. 병원 문을 열고 나가면 실타래는 이전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굴러갈 것이고, 실타래에서 풀려나간 실은 밟히고 쓸리고 상하면서 먼지가 되어갈 것이다. 친밀했던 사람, 아끼던 사람, 익숙한 냄새를 잃게 될 것이고 세상도 그 속도로 고모를 잊어갈 터였다.
~ 하나의 실존은 그렇게 작아지고 또 작아지면서 아무도 모르게 절연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 누구의 배웅도 없이, 따뜻한 작별의 입맞춤과 헌사의 문장도 없이... 오후가 저녁이 되고 저녁이 밤이 될 때까지, 실제로 고모는 그 문을 열지 못했다.   

- 조해진, 빛의 호위, 2017, 창비, p.82-83     


 글을 쓰면서 내 안에 갇히는 고립에서 벗어나, 그동안 받았던 사소한 호의를 기억하게 되었다. 그리고 고립되는 누군가에게 나도 기억하지 못할 사소한 호를 건네고 가끔 안부를 묻고 싶어졌다.      


 그렇게 서로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살리기 위해 계속 글을 쓰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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