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기억될 아빠라는 단어
널 처음 안았던 날을 아직 기억한다.
작은 발과 손, 꼬물거리던 손가락.
그 순간 알았다.
넌 내게 평생 보물로 살아갈 것이란 사실을.
그리고 깨달았다.
이제부터 너는 평생을 기억할 내 모습을 그려가겠다는 것을.
어쩌면 그 순간이,
이 모든 고민의 시작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 가족은 지난 몇 대에 걸쳐 저주에 가까운 고통을 겪었다.
고조할아버지는 막대한 유산을 남기셨지만,
증조할아버지는 그 많던 유산을 살아생전 모두 탕진했고,
할아버지를 위한 그 어떤 교육도 하지 않으셨다.
그렇게 탕아로 자란 할아버지는 술주정을 달고 살았고,
아버지는 학대에 가까운 할아버지의 교육 아래에서 크셨다.
가난이 지긋지긋했던 아버지께서는 공부를 통해 자수성가에 성공하셨지만,
할아버지의 사랑을 한 줌도 받아보지 못했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는 모르시겠다 말씀하시며 나를 키웠냈다.
처음 아이가 생겼을 때,
난 아들이 태어날까 봐 두려웠다.
난 아직 어리고 미숙해 아들이 태어난다면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다행히 태어난 아이는 딸이었고,
나는 잠시 아빠로서 아빠가 해야 할 일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나의 증조할아버지는 그를 기억하는 모든 이에게 한량으로 회자된다.
아들이었던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신 지 오래되어 그 아들의 평가는 모르겠지만,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 믿는다.
증조할아버지는 6형제를 키우셨고,
6형제 모두 평등하게 방치하셨으니까.
그렇게 자란 할아버지는 우리 아버지의 기억 속에 깊은 상처로 남았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렇게나 미워하고, 원망하면서 크셨으면서도 아버지 마음 한편에 할아버지의 사랑을 위한 빈자리가
아직까지 빈 채로, 영원히 채워지지 못할 공간으로 남아버렸음을 안다.
30년 전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그렇게 본인의 아들에게 가장 큰 상처로 자리 잡았다.
내게 아버지란 어떨까.
아버지를 생각하면 나 또한 불편했던 마음과 깊은 상처로 남은 기억들이 먼저 떠오른다.
꽤 오랜 시간을 서로 화해하며 관계를 만들어가고 있음에도,
아직 내게도 아버지라는 이름 상처다.
아마도 내가 죽는 그날까지 그 상처는 아물 일이 없겠지.
이렇게 우리 가족은,
대를 이어가며,
자식에게 상처가 되는 저주의 굴레를 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너는 나를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하루가 멀다 하고 집을 비우는 아빠.
네가 입학을 할 때에도, 졸업을 할 때에도,
네가 필요한 많은 순간에 난 그곳에 없을지도 모른다.
때로는 야근으로,
때로는 해외 출장으로.
넌 내게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겠지.
지구 반대편에서 하루 고작 몇 분 할 수 있는 통화만으로,
네게 아빠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시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난 잘 알고 있다.
나이가 먹어갈수록 나의 빈자리가 익숙해질 수도 있고,
때때로 엄마의 눈물을 보며 나를 원망하다,
그 커진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나를 증오하게 될 수도 있겠다.
이미 난, 고작 3번밖에 없었던 네 생일을 놓쳤으니까.
그런 네게 아빠가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려면,
가끔 사 들고 들어오는 선물 몇 개로는 한참 부족할지도 모르겠다.
어느 순간부터 아빠와의 영상통화를 거부하는 널 보며,
이런 내 걱정이 어느 날엔가는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거짓이겠지.
다만,
내가 너에게 말할 수 있는, 정말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난 내 모든 순간을 너와 네 엄마를 위해 살아간다.
하늘은 물론,
그 누구 앞에서도 떳떳하지 못한 적이 없고,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도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낸다 단언하겠다.
네게 한참 부족한 시간일지언정,
그 부족한 시간 모두는 너의 것이다.
그리하여 네게 내가 무엇으로 기억되더라도,
내가 너와 너의 엄마를 버렸다는 생각이 자리 잡을 곳은 없게 만들겠다.
그저 바쁜 아빠일 뿐,
부족하고 바쁜 아빠라서,
그래서 너의 마음의 빈자리가 생겼다고 기억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조금씩 미움과 원망의 굴레를 끊어내 보자.
언젠가 네가 원하는 순간이 온다면,
넌 온전히 사랑받는 엄마가 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