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내게 물어올 질문을 준비해야지
어렸을 적,
학교에서 부모님 직업을 물어보면
"아버지는 회사원이시고 어머니는 프로그래머입니다."
라고 대답했던 기억이 있다.
어머니의 직업은 평생이 프로그래머이셨기에,
적어도 구체적으로 뭘 하시는지는 모르더라도,
어떤 일을 하시는지는 머릿속에서 그려볼 수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직업이 대기업 재무부장이었다는 사실과,
그 단어의 제대로 된 의미를 알기까지는 성인이 되고 나서도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버지는 말 수가 적으신 분이기도 하셨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본인이 회사에서 하는 일을 설명해 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셨던 것 같다.
어머니의 직업이었던 "프로그래머"의 경우,
복잡한 배경지식 없이도 간단하게 그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지만,
재무부장이었던 아버지의 모습은,
한참 사회생활을 한 지금에서야 간신히 그 모습이 그려지는 수준이니,
설명을 하셨다 한들 어린 내가 이해했을 리도 없다.
하지만 늘 나의 마음속에는,
아버지의 직업에 대한 궁금증과,
다른 사람들에게 아버지를 "회사원"으로 밖에 소개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자리 잡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내가 사회에 나온 뒤에는,
세상이 많이 변했다.
어렸을 때 설문지에 적어서 제출하던 것이 고작이었던 "부모님의 직업"은,
이제는 직접 교실에 부모님이 일일 선생님이 되어 친구들에게 소개하는 세상이 되었다.
언젠가 다녔던 회사의 대표님께서는,
자신은 정장을 입고 회사에서 취급하던 복잡한 정밀 기계를 가져가 보여줬다고 자랑하시곤 했다.
그제야 잊고 지냈던 옛날 기억과 함께 스스로 의문이 들었다.
"무역상인 나는 대체 나의 딸에게 내 직업을 어떻게 소개해야 할까?"
라는.
아직 어린 딸은 내가 하는 일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이제 고작 "아빠는 회사에 다닌다"를 인지하는 정도이니,
회사에서 무엇을 하는지, 도대체 "일"이란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늘 그랬듯 딸은 순식간에 커버릴 것이고,
그렇게 큰 딸은 내가 준비되기도 전에 내게 이런 질문을 물어올지도 모르겠다.
"아빠, 아빠는 대체 뭘 하길래 그렇게 맨날 집에 없고 바쁜 거야?"
딸의 말처럼 나는 바쁘다.
무역상의 업무 시간은 24시간 열려있는 편의점과 같아서,
집에 있다고 퇴근한 것이라 보기도 어려운 날들이 많다.
아니, 해외에 있어 퇴근조차 못하는 처지에 무슨.
아마, 조금씩 딸이 자라다보면 이런 아빠의 모습이 주변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을지도 모르겠다.
"이번 생일에도 없어?"
"졸업식 하는데 아빠 못 오지?"
"아니야 그냥 엄마한테 물어볼게. 아빠 어차피 바쁘잖아."
라는 평가를 순서대로 듣게 될 운명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미리 대답을 준비해 두기로 했다.
나는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너의 성장에 맞춰 조금씩 알려줄 수 있게,
너의 마음에 아빠란 사람의 자리가 사라지지 않도록.
그렇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 정한 나의 이름.
"세상을 떠도는 낭만 무역상"
난 세상을 떠돌며 씨앗을 심고, 이야기를 전한다.
때로 물건을 팔기도 하지만,
결국 난 세상을 이어가는 작은 선을 그리는 사람이다.
그렇게 그려진 선들은 세상과 세상을 잇고,
내가 뿌린 이야기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살아 숨 쉬며,
이윽고 언젠가 내가 심은 씨앗들이 세상 곳곳에 피어날 것이다.
그렇게 싹을 틔운 씨앗들은,
내 딸아,
네가 세상에 나왔을 때 무수한 꽃들이 되어 세상에 향기를 퍼트리고,
뿌리와 뿌리를 이어 이 세상이 더 견고하게 만들 것이다.
그리하여 넌 내가 만든 세상 위에 그 향기를 맡으며 살아갈 것이다.
그러니 자랑스러워해도 좋다.
난 네 앞에 부끄럼 없는 삶을 살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