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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에서 찾은 노력 <더 제로 신발>

by DesignBackstage
캬~


탄산음료가 식도를 지나며 타들어가는 듯한 고통을 이겨낸 뒤 자연스레 나오는 소리다. 이 짜릿한 자극은 아무리 심한 갈증도 한 번에 해결해 주는 듯하다. 하지만 건강검진 결과를 받을 때마다 길어지는 의사 소견글에 죄책감은 무거웠고, 이를 떨쳐내기 위해 이런 질문을 자주 한다.

이모, 여기 제로 있어요?


제로 칼로리 음료는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맛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외면받던 제로칼로리 음료는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제로'는 0을 의미하며 수량이 없거나 영향을 미치지 않음을 뜻한다. 그래서 주로 부정적인 단어 앞에 붙으면 긍정적인 의미로 바뀌게 된다. 쓰레기를 전혀 만들지 않거나 최소화하는 '제로 웨이스트', 이자율이 0%인 '제로금리', 설탕 0g인 '제로슈가'처럼 말이다. 제로 단어가 앞에 붙었을 뿐인데 문제가 다 해결된 느낌이다.'제로'는 수량이 없다는 사전적인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시작, 가능성, 도전, 혹은 새로운 기회를 뜻하는 상징적 의미로도 많이 사용되며 희망적인 메세지를 준다. 제로에서부터 시작하자!'라는 말은 과거의 경험이나 생각에 의존하지 않고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해야 할 때 자주 쓰는 말이다.


며칠 전 고정관념을 송두리째 날려버린 제품을 만났다. 제품명이 무려 'The Zero'. 제품에 'The' 붙는다는 건 제품의 특정성을 강조하거나 고유한 의미를 부여할 때 주로 쓰인다. 한 마디로 제품에 자신 있다고 여겨지는 이름이다. 이 진지한 '더제로'는 2025 FW 발렌시아가 컬렉션으로 곧 출시를 앞둔 신발이다.

스크린샷 2025-01-09 093000.png @myfacewheno_o/Instagram

여러 장의 사진과 모델이 신은 사진을 확인해 봤다. 신발이 맞았다. 신발안에 넣는 깔창이 아니었다. 이 제품을 신발이라 부를 수 있을까? 내가 아는 신발은 외부 환경으로부터의 발을 보호하고, 피로를 덜어주는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자신의 취향을 표현하기도 한다. '더 제로'는 신발 본질에 집중한 제품이라고 소개되어 있지만 일단 이 세 가지 기능에는 충족하는 것이 없었다. 제품을 자세히 살펴보니 '신발'자체의 기능보다는 '걷기'에 집중한 제품으로 보였다. 실제 발렌시아가는 이 제품을 '맨발 걷기'를 위한 제로 슈즈라 소개했다.

Balenciaga 'The Zero'

발을 땅에 최대한 가까이하기 위해 초경량 소재를 사용했고, 발바닥 모양 그대로 3D 성형한 제품이다. 신발의 윗부분과 측면 부분을 과감히 없애고 엄지발가락 덮개만 남겼다. 그 조차도 신발이 벗겨지지 않게 고정시키는 역할 정도로만 보였다.

땅을 밟는 행위는 매일 하는 일이지만 한 번도 땅을 느껴봐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신발의 윗면과 옆면이 없다면 발이 얼마나 더러워질지에 대한 고민은 해봤지만, 자연을 더 가까이 느낄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이 제품을 만들며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지 제로에서 시작했을 것이다. 아무것도 신지 않은 채로, 아무런 고정관념도 없이 내가 걷기 위해 신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에만 몰두했을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 제로에서 전에 없던 새로운 것이 만들어졌다.


누군가는 '부자들의 컬렉터용 제품이다', '짚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엄지발가락이 골절될 것 같다' 라며 조롱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신발이라는 기능으로만 바라보면 그렇게 바라볼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단순히 신발로만 바라볼 순 없었다. 해본 적 없는 새로운 일을 마주 할 때, 다 수포로 돌아가면 어쩌지? 다시 원점인 거 아니야?라는 생각을 하며 두려워했던 내게 보내는 메세지 였다. 다 잊고 원점에서 시작하면 전에 없던 새로운 것이 펼쳐진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2025년 올가을 출시되는 이 제품의 예상가격은 450달러 한화로 64만원이다. 구매하기에는 많이 망설여지는 가격이지만 내게 응원의 메세지를 던져준 만큼 '더제로'를 출시하자마자 한번 신어보러 가야겠다. 신발을 꾹 눌러 신으면 원점에서 새롭게 다시 시작하라는 제로버튼을 눌러 줄 것만 같다. 그때까진 일단 제로 콜라와 함께 시작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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