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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토 Sep 06. 2024

오늘밤도, 유령이 됩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예민함 그리고 생각 과잉, 불안, 우울


















새벽 2시. 아이들 장난감인 작은 전등을 들고 집 안 구석구석을 조심스레 돌아다닙니다. 정리를 하면 소리가 날까, 음식을 하면 아이들이 깰까 할 수 있는 일이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책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아 몇 번이고 잡았다 놓기를 되풀이했고, 그렇다고 영상을 보는 것도 썩 내키지 않아 베란다에 나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는 다시 이리저리 헤맵니다. 그러다 부엌 유리문에 비친 내 모습에 내가 화들짝 놀라 무릎이 풀리고 맙니다. “유령이다”



이처럼 매일 밤 유령이 되는 저는 예민한 사람입니다. 상대방의 언어, 비언어적 표현을 잘 알아채고, 완벽주의 성향이 있으며, 주변 자극에 민감하고, 자신만의 공간이 필요하고, 예의가 바르고, 관심 있는 일에 지나치게 집중하고, 걱정이나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감정 기복이 심하고 어느 하나 틀린 말이 하나 없습니다. ‘예민함’과 관련된 책들을 읽어보면 예민함의 장점은 참으로 무시무시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위인들 대부분이 예민한 사람일 정도로 섬세하다, 꼼꼼하다, 감각적이다, 관찰력이 뛰어나다, 이해와 배려를 잘 한다, 기억력이 좋다 등등 장점이 얼마나 수두룩한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말이지요, 저는 제가 가진 수많은 단점 중에도 이 예민함을 제일 미워합니다. 어느 정도냐 하면 친엄마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많은 엄마나 늘 속을 썩이는 남편보다도 더 밉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 어떤 고난이나 시련도 그저 내 몫이려니 이를 악물고 버티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예민함이라는 것이 불쏘시개가 되어 언제나 나의 인생을 더 시궁창으로 빠뜨려놓았던 까닭입니다.




오늘은 예민함을 흉 좀 보겠습니다. 예민함의 가장 큰 문제는 생각 과잉(정신적 과잉활동)을 꼭 데리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일상에서의 사소한 사고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머릿속 생각들을 통제하지 못하는 상태’의 생각 과잉은 항상 불에 기름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예민함이라는 불쏘시개에 기름을 부어 작은 일도 엄청나게 큰 사건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동네 엄마들을 만나 커피를 마셨다고 해보겠습니다. 그런데 왠지 오늘 A 엄마의 기분이 좋지 않아 보입니다. 예민한 나는 그 엄마의 표정이나 안색이 평소와 다르다고 캐치했습니다. 여기서 끝이면 좋은데, 안타깝게도 예민함의 단짝인 생각 과잉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온갖 정보와 추측을 양산해냅니다. ‘저번 모임에 안 나오더니, 집에 무슨 일 있나?’, ‘유독 내 말에 표정이 어두웠어, 나를 싫어하나?’, ‘아니면 아까 급여 이야기할 때 반응이 없던데, 듣기 불편했나?',  ‘다음에 만나서 다시 한번 살펴봐야겠어, ’나 때문은 아니겠지?‘ 분석부터 시작해 재단, 추측, 판단, 평가, 상상 등등 참 끝이 없이 이어집니다. 


큰 문제에서는 사태가 더욱 걷잡을 수 없어집니다. 남편이 나를 속이고 신뢰를 저버리는 사고를 쳤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을 생각해 나는 모든 것을 용서하고 덮고 살기로 결정을 내립니다. 죽도록 힘든 일이겠지만 신뢰를 다시 쌓아보기로 맘을 먹습니다. 그런데 이 예민함과 생각 과잉이 가족 전체의 삶까지 그냥 지옥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누구나 그럴 수 있는 사소한 남편의 행동이나 말도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사건으로 둔갑시켜버리는 것입니다. ‘나한테 한 짓이 있는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또 나를 속이려는 것이 분명해.’, ‘아이들 두고 맹세해놓고 또 나쁜 짓을 하는 게 틀림없어.’ 이렇게 불행의 화마가 눈앞에서 삶을 끝없이 덮치는데도 나는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예민함이 나는 두렵습니다.    



나는 앞으로도 무수히 남은 많은 밤을 유령이 되어 떠돌 것입니다. 나의 예민함과 그에 따라오는 생각 과잉, 불안, 우울 그 모두 평생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이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어떤 책 하나로, 어떤 방법으로 이 모든 것을 극복했다고 말하고 싶지만, 실은 전혀 그렇지가 못합니다. 많이 부럽기는 하지만 저의 것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한발이라도 내딛고 싶습니다.

자신의 예민함과 생각 과잉을 인지하고, 몸을 움직이고, 폰이나 SNS의 활동을 줄이고, 효율적인 시간 관리를 하고, 규칙적인 운동이나 명상을 하고, 오늘도 공부를 하고 받아적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남은 인생동안 안고 가야한다면, 조금이라도 짐을 무겁게 만드는 일, 그게 내가 현재 있는 유일한 일이라고 틈만나면 나를 다독입니다.



오늘밤도,  저는 유령이 됩니다.

이왕이면 불안하고 우울한 유령이 아닌, 즐겁고 야무진 유령이 되고 싶어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어디 또 수정할 데 없나.

글이 맘에 안 들어.

다음 화는 어떻게 쓰지.

운동은 머를 해야 하나.

헬스장 등록부터 내일 할까.

반찬은 머 또 하지.

그 사람은 도대체 왜 그런 말을 하는거야?

오늘밤도 이렇게 지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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