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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 매거진 브릭스 Sep 09. 2020

바람의 진심을 가지는 알까

'바람처럼'의 위대한 의미

<도덕경> 2장 공성이불거 功成而不居 
: 일이 이루어져도 그 안에 머물지 않는다.


누구 하나 밥을 빌어 오지 않았으나, 저마다 걸으려 한 목적은 따로 있었던 것 같으나, 그 모임의 이름은 생명, 생태, 인간성, 평화를 염원하는 탁발 순례였다. 내가 염원한 건 나의 제정신이었다. 유학은 불발되었고, 대학에선 제적되었다. 잠시 가정에 복귀해 주 이틀 학원에서 중학생 국어를 가르쳤지만, 정신이 제자리를 잡지 못해 그만두고 엄마가 차려주는 밥을 먹는 게 하루 일과였다. 그날 밤은 제정신이 유난히 멀리까지 나가 헤매고 있었다. 나는 꿈결처럼 가위를 들고 욕실로 갔다. 대강, 머리카락을 한 줌씩 끊어내고선 면도기를 들었다.


매일 밤, 죽은 친구가 발밑에 앉아 내 마음을 들여다보았다. 베란다 창에 기대앉아 아무 말 없이, 물끄러미. 그러나 침묵의 시선은 내게 줄곧, 그리고 또렷한 발음으로 묻고 있었다. 


“너 진심이었니?”


그와 친구로 지내온 16년. 내가 그를 진심으로 대해 왔던가? 모르겠다. 중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는 이유로, 그가 이번 토요일 자기 집으로 놀러 가자고 한 이후로. 그게 16년을 이어 온 전부였을까?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누구도 진심 같은 걸 묻지 않았다. 마음 따위야 어떻든 겉으로 보이기에 그와 나는 가장 각별한 사이였다. 설령 누가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이용하려는 마음이었다 해도, 그가 살아 있고 내가 살아 있는 한 서로 ‘진심’ 같은 건 묻지 않았을 것이다. 각자 그때그때 눈앞에 닥친 상황, 변화, 반복을 꾸역꾸역 살아가기도 바빴을 거고, 시간을 내고 품을 들여 도왔을 것이다. 진심을 담아? 그가 살아 있었다면 계속 진심이었겠지, 그든, 나든. 하지만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을 속이는 건 정말 불가능했다.



방으로 찾아오지 않는 날, 그는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 중학교 때 우리 집 기억나지? 어, 양주에 있는 빨간 벽돌 집. 그래, 거기 숨어 지냈어, 진짜 미안해, 속이려고 한 건 아니고, 사정이 그랬어, 빚도 빚이고. 자세한 건 만나서 얘기하자. 그래, 미안해, 너한테는 얘기했어야 했는데. 


꿈에서 깨면 그가 충남 예산 어딘가의 납골당으로 가 버린 현실이었고, 그 현실이 하루하루 연장되며 나는 차츰 그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분명히 구분하지 못하게 되었다. 삶과 죽음이 현실에서 어떤 차이를 만들어 내는지 헷갈렸다. 휴대전화에는 여전히 그의 전화번호가 저장되어 있었고, 나는 습관적으로 전화기를 만지작거리며 그에게 전화를 걸어 볼까 말까 망설였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정신이 영 자리를 못 잡던 날, ‘진심’ 같은 게 사람 사이에 문제가 되는 거라면 이제 아무도 만나지 않겠다 화를 내며 휴대폰을 또각또각 부러뜨렸다. 그의 전화번호는 완전히 지워졌다.




면도기로 머리를 미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 줄 몰랐다. 두 시간 넘게 욕실에 서 있었지만 겨우 정수리까지 진행되었다. 더 이상 팔을 못 들고 있겠다. 하지만 뒷머리는 그대로다. 어깨까지 늘어진 채로. 


“엄마, 도와 줘.”


잠든 엄마를 깨웠다. 민주 가정의 ‘원리’, 엄마의 관용은 자다 깨서도 침착하고 평온했다. 


“왜 머리를 밀고 있는 거니?”


“탈모약 잘 들으라고.”


엄마가 정리해 준 뒷머리에 까끌까끌 감촉과 자취가 살아날 즈음, 나는 충남 예산으로 갔다. 그의 유골함을 찾아간 건 아니었다. 멀리 남도에서부터 걸어올라 온 생명과 생태와 평화를 염원하는 순례단이 예산에 닿는 날이었다. 그들의 종착지는 임진각이었지만, 나의 종착지는 일주일 뒤에 닿을 어딘가였다. 걷기를 연장할 마음도 있었다. 내가 낯선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만 있다면. 그래서 단체에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순례단 끝에 서서 논길, 들판, 야산을 걸었다. 몇 군데 문화재와 종교 시설에 앉아 쉬며 지역 문화 해설사들의 설명을 들었다. 원불교, 천도교 시설에서 잠을 잔 날도 있었다. 마을회관에서 잔 날에는 몇몇이 술을 마시러 나갔다. 맥주를 마시고 싶었지만, 함께 가지 않았다. 낯선 사람들과 잘 어울리질 못해서. 어느 집 외양간 옆방에서 잔 날에는 소들이 뒤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경허, 고봉, 만공, 숭산 스님의 커다란 선맥이 흐르는 수덕사에서 잠을 잔 건 아마 주말이 막 지난 때였던 것 같다. 주말 단기 참가자들이 막 돌아가고 난 날 저녁 느닷없이 순례단 점검 회의가 열렸다. 주말 참가자, 단기 참가자들을 제외한, 오랫동안 순례를 해 온 사람들 사이에 무언가 이야기가 있었나 보다. 긴급회의의 주제는 새로운 참가자, 단기 참가자와 기존 순례자들 사이의 구별, 차등이 있어야 한다, 짧게 왔다 가는 이들이 장기 순례단에게 피해를 준다,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어떤 피해 사례가 있었던 걸까,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없었다. 거기 나온 사례 넷 중 셋이 내 이야기였으므로. 


1. 어제 아침 누군가 샤워를 하더라. 이 추운 날 욕실도 제대로 없는 곳에서 꼭 샤워까지 해야 하나. 감기라도 걸리면 다른 사람에게 엄청난 피해다. 만약 스님이 감기에 옮으시기라도 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내면의 변론: 추운 날이었다. 온수 시설이 열악해 씻는 시간이 붐빌 것 같았다. 기상 시간보다 30분 먼저 일어나 바가지로 물을 퍼서 머리를 감고, 수건을 적셔 몸을 닦았다. 샤워를 할 수 있는 물살이 아니었다. 감기는 개별적으로 순례에 참가하신 스님 한 분이 이미 걸려 있었다. 다들 극진히 그 스님을 모셨다. 스님 이건 너무 피해입니다, 누구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2. 순례를 가장 오래하신 분한테 누나라고 부르며 바로 뒤에서 걷고 있더라. 호칭도 그렇고, 온 지 얼마 안 된 사람이 대열 앞에서 건 굉장히 건방진 행동이다. 순례 대열에는 엄연히 서열이 있다. 다들 자기 위치를 파악하고 예의를 지켰으면 좋겠다. 


내면의 변론 : 누군가 왜 머리가 짧은지 물어서 대답하다 보니 그 뒤에서 걷게 되었다. 나보다 열 살이 많다고, 편하게 누나라고 부르라 해서 이 아줌마가 왜 이러실까 생각하며 누나라 불렀다. 생명은 그렇다 치고 평화를 염원하며 걷는 사람들이 먼저 온 순서대로 서열을 매기는 건 별로 평화로운 것 같지 않다. 


3. 우리나라에는 보도연맹처럼 중대한 일이 산적해 있다. 문화 어쩌고 하는 잡담으로 순례의 정숙한 분위기를 깨는 사람도 있다.


내면의 별론 : 순례가 아니라 휴식 시간이었다. 추사 김정희 고택을 둘러보며 ‘불이선란’이 무슨 의미인지 아냐고, 순례 최고참 ‘누나’가 물으시기에, 잘 모르겠으나, 난을 그리는 것과 선정에 드는 것이 다르지 않다, 그런 경지에서 난을 그렸으니, 진짜 난은 여기에 그린 게 아니다, 뭐 그런 뜻 아닐까요, 문화 초심자들의 대화였다. 보도연맹, 국민방위군, 중요한 사건이란 거 나도 안다. 그렇다고 추사 고택에서 잘 모르는 누나와 할 얘기는 아니다.


나를 향한 세 지적은 모두 보도연맹 규명 단체에서 일한다는 한 남자에게서 나왔다. 저 사람이 ‘누나’한테 관심이 있나, 왜 저럴까 생각하고 있을 때 순례를 이끄는 스님이 회의를 정리하는 말씀을 전했다. 장기 순례자들은 따로 모여 ‘조직’의 효과적 운영을 위한 방안을 마련하라. 그 방안이란 단기 참가자들에게 가해질 제약들이었을 것이다. 뭐, 그런 거 아니었을까 추측뿐인 이유는, 다음날 날이 밝자마자 상쾌하게 샤워를 하고 수덕사 절문을 나왔기 때문이다.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그게 약속한 순례 날짜를 채우지 않고 절문을 나선 이유였다. 그건 며칠 전 순례단의 대표 스님께서 하신 말씀이기도 했다. 집착 없이 내어준다. 베풀었다는 행위 안에 나를 남겨두지 않는다. 노자의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와 같은 말이다. 일을 다 이루면 그곳에 머물지 않는다. 공이 쌓여도 나의 공이라 주장하지 않는다. ‘조직의 효율적 운영 방안’ 같은 소리나 듣게 될 줄 알았다면 혼자 제주도를 걸었을 것이다. 나는 세상에 공을 쌓고 싶지도 않고, 뭔가가 쌓인다 해도 아직은 거기 눌러 붙어 살고 싶다는 욕망을 느낄 수 없는 나이였다. 


예산터미널까지 걸어갔다면 저녁 먹을 때가 되어 도착했을 것이다. 순례에 남았어도 그만큼은 걸었을 테니 못 걸을 거리는 아니었다. 더 이상 나의 이른 귀가를 이례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민주 가정의 너그러움 때문에라도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서는 안 됐다. 끝맺음, 성취가 가능한 인간이란 걸 보여주겠어. 시내에서 하루 자고 갈까, 아니 넉넉하게 일주일 정도 안면도를 걷다 갈까? 산길을 다 내려오기도 전에 순례단의 짐을 싣고 다니던 스타렉스가 경적을 울리며 내 앞 멈췄다. 


“터미널까지 멀어요. 타세요.”


“어차피 종일 걸었을 텐데요.”


내 또래의 남자였다. 그는 순례단과 함께 걷지 않고 차로 미리 숙소에 도착해 있거나 그때그때 필요한 물건을 사 날랐으므로 따로 이야기해 볼 기회가 없던 사람이었다. 그가 지리산 어딘가에 산다든가, 어렸을 때부터 절에서 일을 했다는 정도만 ‘누나’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그래도 타세요. 떠나시는 것 같아 급하게 따라 온 거예요.”


11월의 바람이 국도를 불어가고, 우리는 차창을 열고 안부나 떠나는 사람의 속사정 같은 말이 끼어들지 못하도록 바람 소리에만 집중했다. 한 마디 의례적인 대화 없이 터미널에 도착했다. 


“바람이 불면 가지가 흔들리잖아요.”


시동을 끄며 나지막이, 그가 말했다.


“저는 그런 생각을 해요. 바람이 나뭇가지를 잠시 스쳐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지에서 새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게 되면, 그 안에 바람도 들어 있다고요. 우리가 다시 만나긴 어렵겠지요? 그래도 저는 살아 있는 동안 우리 몸속에 계속해서 이 순간이 남아 있을 거라 생각해요.”


그가 떠난 자리에 잠시 뜨끈한 엔진 열이 감돌았다. 예산 성당과 근대 건축 몇 곳을 둘러보고 예산 시장 근처에서 점심을 먹었다. 이곳 어딘가 묻혀 있다는 친구 생각도 몇 번인가는 했을 것이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한동안 이 병원 저 병원을 옮겨 다녔다. 뇌수막염이 의심된다는 사람도 있었고, 원인을 알 수 없으니 검사를 더 하자는 사람도 있었다. 검사를 받고 주사를 맞고 약을 먹고, 그것들을 다 토했다. 서 있지도 누워 있지도 못하는 고통이 2주가 넘어갈 무렵,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 혼자 버스정류장에 앉아 있다가 문득 아프지 않은데, 하는 느낌이 들었다. 캔 커피를 마시고 싶었다. 편의점에서 우유가 든 커피를 샀다. 혀에 닿는 쌉쌀한 감촉이 몸에 참 달게 느껴졌다.





바람이 불고, 가지가 흔들리고, 그가 나의 현실에 없는 16년이 지났다. 그는 종종 꿈에 나타나 어딘가에 숨어 있다는 전화를 하고, 나는 네가 죽은 건 알고 있어, 나한테 그런 건 이제 별 상관없어, 하고 답한다. 저녁에 베란다에 앉아 맥주를 마실 때면, 자기 아빠 장례식인 줄도 모르고 햄버거를 먹던 아이는 지금쯤 대학생이 됐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어떤 잎을 틔우고, 어떤 꽃을 피웠는지는 아무리 갸웃거려 봐도 떠오르지 않는다. 내 삶, 아무래도 가지보다는 바람이었나 보다. 꽃도, 잎도, 열매도, 이룬 것 없이 떠날 모양이다. 하루하루 흩날려 보내듯 살아 왔구나 싶어질 때는 내가 정말로 세상에 머물고 있기나 한 건가, 살아 있기는 한 건가, 그의 세계와 나의 세계가 전혀 구분되지 않는다. ‘공성’하지 않았기에 머물거나 떠나거나 다를 게 없다. 나는 내 삶에서 이보다 더 좋은 순간은 상상하기 어렵다. 




글 이주호

여행 매거진 BRICKS의 편집장. 여행을 빌미로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글을 쓰고 있으며, 『무덤 건너뛰기』, 『도쿄적 일상』, 『오사카에서 길을 묻다』를 펴냈다.

인스타그램 : @ree_joo_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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