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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 매거진 브릭스 Sep 08. 2020

한옥이라는 신기루

종로, 서촌에서 산다는 건 다툼의 한복판으로 걸어들어가는 일이었다

<도덕경> 4장 좌기예 해기분 화기광 동기진 挫其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
: 도는 날카로운 것을 무디게 하고, 엉킨 것을 풀어주며 자신의 총명한 빛을 부드럽게 감추어 자기 안에 품고서 세상 사람들과 함께하며 감화시킨다. 


이사를 앞두고 짐을 정리하다 보면, 앞으로 살아가게 될 동네, 새 집에서 어떤 생활을 하게 될까,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될까 하는 기대보다는 이번에는 얼마나 살게 될까, 다음에는 또 어디로 가게 될까, 묵묵한 체념으로 컨베이어벨트 앞에 선 기능직처럼 손을 놀린다.


세무사 시험을 준비하던 형이 먹고 자던 한 평 고시원에 얹혀 서울 생활을 시작한 20대 중반 이래 3개월, 6개월, 길게는 1년에 한 번 꼴로 잠 잘 곳을 옮겨 다녔다. 잠만 잘 장소 몸을 우겨 넣는 아주 간소한 이동이었기에 이사라는 말을 쓰기도 민망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까, 그때는 왜 그런 생각조차 들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집 없이 사는 게 힘들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고, 정착이란 건 어쩐지 나이 드는 표식 같았다.


서른 넷, 월세 보증금이나 합쳐 보자는 시답잖은 소리가 엉겁결에 결혼식까지 이어지자 대출, 이사 날짜 조정, 인테리어, 그간 감당하지 않아도 됐던 일들이 몰려들었다. 결혼과 동시에 집은 잠만 자는 공간에서 생활의 공간, 삶의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며 의미를 쌓아가는 공간으로 바뀌었다. 두 사람이 동시에 만족하는 동네, 집 구조, 용도에서도 별 다툼이 없었다. 우리 둘 다 가장 싸고 허름한 공간을 바라보며 이 공간이 우리의 공간으로 바뀌어 있을 모습을 상상하길 좋아했다. 손수 자르고, 칠하고, 쌓고, 붙이며 말끔하지는 않아도 오랜 시간을 들여 우리만의 공간을 완성시켰다.


그러나 그 과정이 내내 행복했던 건 아니다. 부동산 문을 열기만 하면 그 전까지는 완전히 간과하고 있던 ‘계층’이란 벽과 마주해야 했다. 부동산 소파에 앉으면 우리는 ‘서민’에도 미치지 못하는, 품값도 안 나오는 손님이었던 것이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까, 나는 대체 뭘하고 산 건가. 그간 미뤄두었던 자괴감이 한꺼번에 몰려오며 나 자신에 대한 원망과 자책으로 마음의 병이 생겼다. 아침마다 한두 시간씩 한강을 뛰어다니던 심장이, 이사를 준비하고 불과 일주일 만에 의자에 올라서는 것도 벅차 했다. 미루고 미루다 병원에 갔다. 부정맥, 중풍, 뇌졸중 위험. 이사는 해야 했고, 내 손으로 집을 고쳐야 했다.





결혼하고 줄곧 살아오던 마포를 떠나 종로에서 살아보기로 한 건 내가 처음 일을 시작한 곳이 안국동이었던 데다, 그래서 결혼 전 처음 알아 본 집도 종로구 계동이었기 때문이다. 마포에 살고 있어도 내가 가장 잘 알고 자주 다니던 동네가 종로라 한 번쯤은 그곳에서 살고 싶었다. 처음 생각했던 곳은 역시 북촌이었으나 그곳엔 우리가 들어가 살 여지가 없었다. 그나마 서촌에는 아직 사람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심산유곡 같은 골목에 듬성듬성 허물어진 단층 시멘트 집들이 있었다. 우리가 살 집은 차가 들어갈 수 없는 좁은 골목을 두 번이나 꺾어 들어간 끝에 있었다. 1980년에 지어진,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 절대 팔리지 않을 집이라 소문났다던 집이었다. 현관문을 제외한 모든 벽이 옆집 담들에 둘러싸여 있어서, 역시나, 안으로 들어오니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았다. 벽지를 벗겨 내자 무너진 벽과 천장에서 떨어진 흙더미가 쏟아졌다. 욕실 겸 화장실은 현관 밖에 있었고, 거기서는 겨울에 샤워는커녕 손도 씻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작은 집이 아니라 커다란 시름덩어리에 은행 대출까지 받았구나. 왜 잘 살던 망원동을 떠나 종로로 가자 한 거냐, 처음으로 다툼이 벌어졌고, 합당한 이유를 댈 수 없어 매우 감정적으로 입을 닫아 버렸다. 


이상한 얘기지만, 종로 한복판, 경복궁 서촌에 집을 구하기로 한 건 낙타처럼 고립된 듯 호젓하게 살아가고 싶어서였다. 동네에 아파트가 없다는 것과 빌라마저 드물다는 게 이 동네를 고른 결정적 이유였다. 집 하나에 한 가족. 누가 살고, 얼마나 살았고, 무얼 하며, 어떻게 살고 있다. 대문은 그 집의 가족사진이었다. 망원동의 밀집된 주택가에서 엉킨 시금치나물처럼 살다가, 대리석으로 깐 골목에 기와지붕들과 돌담이 이어진 골목을 걷자니 시금치나물을 가닥가닥 먹기 좋게 풀어 놓은 것 같았다.



천장을 걷어 내며 기둥을 보강하고, 벽에 구멍을 내 창을 만들었다. 나란한 두 집이 한옥 신축을 하고 있었고, 우리는 한옥과 전혀 관련이 없었다. 그 때문인지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 텃세와 갈등이 생겨났다. 우리가 살러 온 곳이 하필 서울시 한옥지정구역이라 이곳에 집을 마련한 사람들은 서울시의 공사 지원금을 받아 한옥을 지었다. 하지만 내가 한옥을 지어야겠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신축보다 대수선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신축이나 대수선이나 새로 적용된 건축법에 따라 용적률이 50~60%로 줄어들기 때문에 땅 가득 집을 지었던 예전 면적에서 손실을 많이 보게 된다. 한옥의 경우 완화 조건이 있어 80%까지는 지을 수 있다고 하지만, 일부러 한옥을 택한 사람들이 마당을 포기할 수는 없으므로 집이 작아질 수밖에 없다. 이 동네의 집들은 정말 다닥다닥 벽을 맞대고 있는데, 집에 크게 손을 대게 되면 옆집과의 면적을 떼어야 한다. 현재의 건축법과 예전 지은 집과의 충돌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래도 어찌 어찌 수를 내어 구청의 허가까지는 받을 수 있지만 이웃 동의 절차에서 다들 좌절하고 만다.


집집마다 옆집, 뒷집 사이의 경계가 불분명해 소송 한두 개 정도는 안고 살았다. 이곳은 서울시내 한복판, 경복궁 서촌. 땅 한 평이라도 꽤나 큰돈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집을 고치거나 새로 지으려 하면 시비꾼들도 몰려든다. 민원이 접수되고, 골목에 버려진 자갈 하나 해결하지 못하는 공무원이 등장한다. 민원 내용은 자기네 집 벽에 방수를 해 달라, 새로 페인트를 칠해 달라, 공사 시작하고 자기 집 하수구가 자주 막히니 싱크대 공사를 해 달라, 터무니가 있고 없고를 가리지 않는다. 공사 시작도 전에 내가 안게 된 시비는 두 건의 땅 싸움과, 한 건의 지붕 싸움이었다.



그중 지붕 싸움은 한옥 목수가 산다는 옆집과의 시비였다. 첫 마주침에서 대뜸 우리 집 지붕에서 흐르는 물이 자기 집 지붕에 떨어졌다가 차양을 타고 떨어진다며 그걸 잘 알아두라고 했다. 어쩌라는 거지요? 우리 집은 1981년에 지어졌고, 그쪽 집은 2010년대 후반에 지어졌다. 신축하는 집의 지붕에 물이 떨어지지 않게 1981년에 지은 집의 지붕을 걷어내라는 것인가? 처음부터 지붕이 겹치지 않게 지었으면 될 것을 집 면적을 늘리겠다고 지붕까지 겹치게 바짝 지어 놓고서 도리어 같잖은 소리인가. 이후 그와 마주치게 될 때면 길가에 놓인 고양이 사료 보듯 하며 지나쳐 버렸다.



마침내 분쟁을 끝내나 싶었는데 몇 개의 민원으로 벌금이 날아오고, 구청 직원이 찾아오고, 드디어 거대한 벌금이 부과되었다. 자기가 사는 골목도 아니면서 할 일 없이 남의 공사를 기웃거리다가 꼬투리가 잡혔다 싶으면 구청에 신고하는 오랜 거주민들의 짓이었다. 몇 달이고 공사 차량이 드나드는 게 불만이었던 골목 입구 상가 사람들은 시시때때 페인트를 칠해 달라, 벽을 수리해 달라 요구해 왔다. 한옥마을이라 한옥을 짓는 사람들과는 자연 오랜 안면이 있다 보니 처음 보는 나를 호구로 잡은 것이었다. 


또, 서울시의 공사 지원금 기준이 외양에만 있고 그 집에 살게 될 사람들의 생활, 특히 냉난방은 완전히 등한시하다 보니 집이 허술하게 지어진다. 한옥은 기둥이 겉으로 드러나야 하기에 콘크리트 건축물보다 벽이 얇을 수밖에 없다. 여기에 옛날처럼 진흙에 볏단을 섞어서 바르거나 비싼 황토벽돌을 사용하는 것도 아니라서 사실 기둥과 지붕 말고는 한옥이라 할 만한 것도 없다. 집주인이 일일이 신경을 쓰지 않으면 공사단가를 낮추기 위해 합판으로 벽을 대고 아이소핑크라는 얇은 단열재 하나를 끼우고 석고보드로 내장을 마감해 버린다. 바깥은 돌로 마감을 하거나 회벽을 칠하니 밖에서 보면 돌집처럼 튼튼해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합판에 스티로폼 한 장 덧대 놓은 것이다. 인대에 약간 무리가 가는 선에서 맨몸으로도 철거가 가능하다. 건축주가 일일이 신경 쓰는 집은 유리섬유나 경질폴리우레탄 재질의 단열재를 쓰고 벽돌이나 값이 나가는 사괴석을 정사각형으로 다듬어 쓴다. 그런데 내가 오가며 본 바로는 공사를 하는 날이 들쭉날쭉해서 건축주가 일일이 신경 쓰기 어려워 보인다.


한옥 건축의 특징은 건축 재료와 양식이 합일되는 이상적인 건축양식이라는 것이다. 목수가 나무를 하고, 석공이 돌담을 쌓고, 와공이 지붕을 올리고, 미장이 회벽을 칠한다. 목수도 구조만 세우는 대목과 대문을 짜는 목수, 창호를 짜는 목수로 분장되어 있다. 현대 건축과 다르게 한옥은 집이 완공되어도 이 한 사람, 한 사람의 공정이 모두 노출된다. 한국의 집들은 원래가 구조, 재료들이 그대로 집 명칭이 되어 왔다. 초가, 너와, 흙집, 돌집. 따라서 그 공정마다 장인이 있었고, 다 나름의 일하는 방식이 있다. 일하는 태도가 각기 달라 마음에 들고 안 들고의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그들을 인정하는 기준은 일하는 방식이 아니라 공정을 끝마쳤을 때 겉으로 드러나 있는 그들의 솜씨다. 그러니까 현장에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는 목수를 만나게 되면 그는 절대 대목일 수 없고, 기둥을 세워서는 안 되며, 보통은 건축보다는 수리에 적합한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그게 내가 지난 1년간 겪은 한옥마을이 만들어지는 과정이었다. 그러다 보니 현대건축을 더 사랑하게 되었고, 나의 집을 빨간 벽돌과 시스템창호로 마감한 것을 참 다행으로 여겼다. 한옥마을에까지 와서 굳이 서양식 집에 살아야 하나, 그렇게 물어 본 사람은 없지만, 내가 살고자 했던 건 종로였지 한옥이 아니었다. 하지만 낙타처럼 살고자 했던 처음의 바람은 완전히 무너져 버린 듯했다. 


옆집과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어깨싸움을 벌이며 살아야 하는 걸까, 지나치는 사람, 지나가다 우리 집을 슬쩍 올라다 보는 모든 사람을 경계하고 미워하며 살아야 하는 걸까? 나는 어쩌다 한국의 자메이카, 피스, 러브, 야만의 망원동을 떠나 땅 싸움의 한복판 종로로 오게 됐을까. 수없이 후회했고, 자책했다. 





글 이주호

여행 매거진 BRICKS의 편집장. 여행을 빌미로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글을 쓰고 있으며, 『무덤 건너뛰기』, 『도쿄적 일상』, 『오사카에서 길을 묻다』를 펴냈다.

인스타그램 : @ree_joo_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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