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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 매거진 브릭스 Sep 07. 2020

달팽이 구조대 수칙: 너는 세상을 달팽이만큼도 모른다

그리스로 유학을 떠나려 했지만


<도덕경> 63장 위무위爲無爲 사무사事無事 미무미味無味
: 무위를 행하고, 일이 없는 것으로 일을 삼고, 맛이 없는 것으로 참맛을 삼는다.


박찬호, 김병현 선수가 등판하는 날에는 학교를 가지 않겠다는 말도 공식적인 합의에 이를 만큼 우리 집은 쓸데없이 민주적인 가정이었다. 그리하여 민주주의의 산실 그리스로 가서 공부해 보겠다고 생각이 싹 튼 건 아니었다. 유학은커녕 여권이 뭔지도 모르던 시절이었다.


스무 살을 생각하면, 아침 일찍 헬스장에서 근육을 만들고, 두어 시간 농구를 하고, 11시에 메이저리그 야구를 보고 늦은 오후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비디오 대여점으로 가서 두세 편을 영화를 빌리고, 우선 그것만 기억하고 싶다. 대학생이 되었지만 내가 원하던 대학은 아니었다. 학교에 가지는 않아도 대학생이 되었다는 지적 충동은 어쩔 수 없었다. 비디오가게에 가면 한 시간 가까이 서성대며 세간에 심오하다는 평들이 떠도는 영화 한 편을 꼭 끼워 넣었다. 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의 <안개 속의 풍경>, <율리시즈의 시선>,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희생>, 레오 카락스 감독의 <나쁜 피>. 내가 속절없이 잠들었던 그 영화들로 세미나를 한다던 동기들을 보며 국문과가 정말 나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신속하게 교양 수업을 제치고 서울극장이나 시네코아에 가서 영화를 보고, YBM어학원, 영풍문고 지하에 있는 레코드 매장에서 음악을 듣는 게 바야흐로 청춘의 행보였다. 학교 선배들과 술을 마시는 때도 더러 있었지만, 친구들 학교도 종로를 중심으로 분포해 있어 주로 그들과 종로5가 닭한마리나 대학로에서 만나 술을 마셨다. 운동권도, 운동을 해야 할 목적도 뚜렷하지 않은 시대였지만, ‘민주 열사’의 후예들이 완전히 비민주적인 태도로 학교생활을 주도하고 있었기에, 집합, 몇몇 학번 밑으로 다 일어나, 머리 박아, 주먹질 따위는 참아주고 싶지 않았다. 그런 태도가 밉보여 선배들에게 불려 나가 으슥한 곳에서 언어적 린치를 당하기 일쑤였으나, 물리적 실랑이로 보복을 하고 나자 ‘빠진 놈’이란 낙인이 붙은 채 단체에서 버려졌다. 



군대를 마치고 이 학교를 계속 다녀야 하나 고심 끝에 정말로 민주의 발상지 그리스에 가보기로 했다. 민주 가정은 일제히 내가 처음부터 그리스 국적자여도 좋았을 거라 결의해 주었다. 그러나 그 합의의 단초는 철학이나 민주가 아니라 종교였다. 교회 목사에게서 한국에 그리스어 성경에 능통한 사람이 드물다는 말을 듣고 온 엄마는 아들을 그리스 유학파 목사로 만들어, 큰 교회를 세우고 돈을 많이 벌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마련해 놓았던 것이다.


그리스라는 말을 구체적으로 입밖으로 내뱉은 건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때문이었다. 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도 그리스 사람이긴 하지만 그로 인해 급격하게 흥미가 줄어가던 그리스에 흥미를 다시 샘솟게 해 준 건 <그리스인 조르바>였다. 민주가정의 꿈과 반대로 나는 무신론자 조르바와 크레테 섬을 동경했고, 마음은 어느새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에서 유다가 진 짐, 예수의 사역을 완성하기 위해 영원한 배신자로 기억되는 저주스런 영광에 사로잡혀 있었다.


스물넷 초여름. 그리스 대사관에 가서 아테네 유학 상담을 받았다. 그들이 알려준 대로 서류를 챙겨 영어 번역본을 만들고 공증을 받은 뒤 국립 아테네 대학으로 DHL을 보냈다. 그 다음 순서는 곧장 아파트 공사장, 결혼식 뷔페, 호프집, 초중등 보습학원 아르바이트였다. 아침이고 밤이고, 주말도 없이 진격하듯 일을 했다. 그래 봤자 유학자금으로 모인 돈은 비행기 값 정도였다. 비행기 표를 사고,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 이제 내게 필요 없게 되리라 장담한 음반, 겨울옷, 책들을 미련 없이 방출했다.




아테네에 도착한 건 합격자 발표가 난다는 9월 초. 태국에서 무려 10시간을 경유하는 싼 비행기를 타고 24시간 만에 아테네 공항에 도착했다. 드디어 내게 적합한 토양에 뿌리를 내리게 됐어. ‘Immigration’ 푯말을 보며 감격하고 기뻐했다. 하지만 세관 앞에서 나의 토양은 먼지가 되어 눈앞의 길을 흐릿하게 가로막았다. 끝내 도장을 찍어주길 거부하던 세관원이 보안요원을 불렀고, 나는 불법 이민자가 끌려가듯 사무실에 내동댕이쳐져 콧수염 난 배불뚝이 보안요원 둘 앞에 하염없이, 아주 가만 앉아 있었다. 당신의 여권이 맞나, 비행기 표 좀 확인하자. 이런 절차도 없이 마냥 방치해 두고서 저이들끼리 나의 신상명세를 추측하다가, 그것도 심드렁해져 파리를 잡는다고 파리채를 들고 다니다 내 머리와 어깨를 내려쳤다. 별다른 확인 절차도 없이, 나는 한 시간 뒤 아테네 공항 밖으로 나섰다. 텅 빈 리무진 버스 정류장에서 앉아 아테네 시내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내가 가진 꿈이란 게 얼마나 초라한 것인지 돌연 알아 버리고 말았다. 백인 사회에 들어선 아시아 남성이란 작고 못생긴, 누렁이란 이름이 어울리는 동물일 뿐이었다.


미리 약속된 한인 민박집에서 점심을 먹고 아테네 버스 이용 설명을 듣고, 오랫동안 잠을 잤다. 피곤해서가 아니었다. 아무리 관광 도시라지만 백인들이 사는 동네를 걸어 다닐 용기가 나지 않았다. 사나흘간 방안에 들어 앉아 차를 마시고, 꿀 섞은 요거트를 먹고, 토마토와 감자를 먹으며 민박집 주인이 한국을 떠나 그리스에 정착하기까지의 이야기를 들었다. 


며칠 뒤 민박집 주인이 그 해의 아테네 대학 합격자 명단을 확인했는데, 한국인 학생의 이름은 없더라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나는 어쩐지 안심이 되어 그날부터 아침마다 아테네의 중심 신타그마 광장에서 버스를 내려 아테네 대학 입구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동상 앞을 서성이고, 리어카에서 파는 프레츨을 씹으며 플라카 지구, 상점가을 돌아다니거나, 공원을 한 바퀴 돌아 올림픽 스타디움에 앉아 점심을 먹었다. 이곳에서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빈약한 기대가 날아가자 나는 홀연 자유로운 여행자가 되었다.


아테네 곳곳을 누비며 뻔뻔스럽게 어디든 들어가 주문을 하고 맥주를 마시고 우조를 마시고 기념품을 샀다. 테살로니키, 메테오라, 수니온, 한국 기업이 실내 장식을 했다는 크루즈를 타고 낙소스, 미코노스, 산토리니 섬에도 갔다. 산토리니에선 방 네 개 있는 하얀 집을 하루 2만 원에 빌려 산토리니 와인을 잔뜩 사다 놓고 생애 처음 와인을 마셨다. 레드 비치, 화이트 비치, 지중해에 발을 담그고 하루를 보내다 백인 할머니 할아버지들 단체관광객이 오면 사진을 찍어주고, 팔짱을 끼고 같이 사진을 찍으며 귀여움을 받기도 했다. 산토리니를 떠나기 전에는 동네 남자들이 완벽하게 민주적인 합의 끝에 한국에서 온 ‘브루스 리’라는 이름도 붙여 주었다.


아테네 대학교 앞 니코스 카잔차키스 두상




아테네 시내를 제외하고 가장 오랜 머문 곳은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라는 신탁이 내려졌다는 델피였다. 너무 작은 마을이라 할 만한 일은 도착하고 두 시간도 안 돼 다 해 버렸고, 카페나 맥주집도 몇 되지 않아 갈 곳은 다 가버렸다. 혹시나 벼락같은 신탁이 내려지지나 않을까 신전들에 앉아 졸기도 하다가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저녁 무렵 도로가 축축해질 때면 길가에 나온 달팽이를 구조해 나뭇잎에 올려주는 사명감에 찬 나흘을 보냈다. 세계의 배꼽, 옴팔로스 돌이 있는 고고학 박물관은 사진을 찍으면 안 되는 곳이지만, 하도 사람이 없어 박물과 직원과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다. 생각할수록 권태로운 날들이었다. 


도로 위 달팽이를 나뭇잎에 올려 두고서


델피에 온 건 오로지 소크라테스 때문이었다. 그의 자취는 아테네에 있겠지만, 소크라테스가 삶과 죽음을 선택했던 기준이 델피에 있었다. 소크라테스가 태어난 건 기원전 469년 정도로 추정되며, 사망한 해는 399년이라는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다.


아테네 최전성기 페리클레스 시대에 20대를 보내던 소크라테스에게 아테네는 세상의 중심이었다. 지중해에 면해 있는 나라들에서 온갖 예술가, 학자, 기술자 들이 아테네로 몰려들었고, 인류 역사상 최고의 민주주의가 꽃피고 있었다. 전쟁에 끌려 나가고, 잔치에 초대돼 밤새워 먹고 마시고, 남자아이를 귀여워하는 분주한 중에도 소크라테스는 틈만 나면 세간의 지혜롭다는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당신이 정말 지혜로운 사람인가? 그럼 내게 알려 달라. 영혼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정의란, 명예란, 애국이란, 덕이란? 지혜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소크라테스는 질문을 던졌다. 그들은 대답했고, 또 대답했고, 자신의 대답 안에서 모순에 빠졌다. 소크라테스가 떠난 자리엔 덩그러니 무지만 남았다. 무지의 함정에 떨어진 사람들은 소크라테스를 증오했다.


그가 이런 공격적인 지적 여정에 나서게 된 건 제자 카레이폰이 델피의 무녀에게 들었다는 신의 말씀 때문이었다.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보다 지혜로운 사람이 있습니까? “없다.” 그것은 신의 말씀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지혜를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혜 있다는 사람들을 찾아가 신탁이 틀렸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가 알게 된 건 사람들이 자신이 하고 있는 말에 대해 사실 별로 아는 바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안다고 말했고, 그 말 안에서 자신이 모른다는 고백을 하고 있었다. 그의 질문은 사람들을 무지로 떨어뜨리는 함정이었다. 


무지에서 무지로 이어지는 징검다리를 건넌 끝에 그가 신탁이 있었다는 델피까지 몸소 왔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아테네에서 120km 정도 떨어진 파르나소스산 정상 부근. 내가 세 시간 넘게 버스를 탔으니, 그가 이곳에 왔었다면 일주일 넘게 걸었을 것이다. 델피의 아폴로 신전은 여러 도시국가 사람들이 신의 조언을 듣고자 찾아오는 곳이었다. 전쟁을 해도 되는지 하는 국가적인 일부터 사사로운 일까지 아폴론 신의 대리인 ‘피티아’라는 여자 무당에게 물으면 무녀가 신의 말을 대신 전해주었다. 신탁에는 물론 대가가 따라서 제사상을 차리든 현금을 내밀든 복채가 있어야 했다. 훗날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너 자신을 알라.” 이 말은 아폴론 신전에 새겨진 여려 경구 중 하나라고도 하고, 솔론이란 사람이 한 말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설령 소크라테스가 직접 이곳에 왔었다 해도 무녀에게 돈까지 줘 가며 신의 말씀을 들으려 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가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델피에서 확인했던 거라면 아마도 신전 기둥과 벽에 새겨진 말들 중 하나에서 골라잡지 않았을까. 여기 새겨진 말 전부가 신의 말씀인데 안 좋은 말씀이 어디 있겠나. 어디 보자, 너 자신을 알라? 오, 좋다. 집에 가자. 


고고학박물관의 옴팔로스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이 소크라테스에 입에서 나왔을 때 그게 어떤 의미였는지 분명하게 알 수는 없지만, 나대로는 “나는 아는 게 없다,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 말고는.” 이란 소크라테스의 다른 말과 대체해서 받아들이고 있다. 물론 그 문장 역시 내 마음에 와 닿기까지는 다시 서술어 ‘알다’가 ‘알아 간다’, ‘알아야 한다’로 바뀌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글 이주호

여행 매거진 BRICKS의 편집장. 여행을 빌미로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글을 쓰고 있으며, 『무덤 건너뛰기』, 『도쿄적 일상』, 『오사카에서 길을 묻다』를 펴냈다.

인스타그램 : @ree_joo_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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