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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 Mar 19. 2024

산들바람이 되고 싶어~

햇살이 따사로운 주말이다.
 오랜만에 친구가 차 한잔 하자고 해서 부리나케 단장을 한다.
 창밖으로 들어오는 햇살은 봄이 온 것 같지만 바깥 날씨는 여전히 겨울의 날 샌 바람이 부는 듯하다. 딸들이 입고 출근하는 옷을 보면 아직은 두꺼운 옷을 챙겨 입고 나가야 하는 날씨인 듯하다. 외출할 때 가장 힘든 계절이 겨울과 봄으로 가는 간절기가 아닌가 싶다. 재택근무로 인해 매일 외출을 하지 않는 나는 오랜만의 약속으로 옷을 고르는데 상당히 까다롭다. 특히나 추위와 바람에 몸이 움추러들고 체력이 고갈되는 저혈압을 가지고 있는 나에겐 냉기가 가득한 차가운 바람이 매우 싫다.
 
 눈부시게 들어오는 햇살로 인해 실내와 외부의 온도 차이를 생각하며 옷을 골라본다.  외투 안에는 조금은 가벼운 니트소재에 양팔은 시스루로 된 반 폴라를 입고 외투는 진한 색보다는 연한 베이지색을 입었다. 커피숍 안에서 차를 마실 계획이니까 외투색과 같은 계열의 봄 부츠를 꺼내 신었다. 바깥 온도는 집안에서 느끼던 체감온도와 확연히 달랐다. 현관문을 나서는데 차갑고 강한 바람은 나의 얼굴을 강타해서 휑하니 머리를 쥐어 틀더니 도망가 버린다. 코트를 좀 더 동여매고 양팔은 나를 꼭 안아주 듯 팔짱을 끼고 걷는다. 친구를 기다리는 동안 얇은 부츠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바람에 발가락은 움츠러들기 시작하고 예리하고 날카로운 바람이 발등을 가는 못으로 긁어내듯이 쓱쓱 그어 댄다. 시리기 시작한다.




  누군가는 바람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그 바람이 나를 지난 한 여름날로 데리고 간다. 강렬한 햇살로 눈이 부셔 고개를 들 수 없는 한여름 날이었다. 나는 고추를 따기 위해 자외선에 노출되지 않도록 무장하고 고추 밭을 향해 가고 있었다. 머리엔 양 옆얼굴을 가려 주는 밭일 할 때 쓰는 모자를 쓰고 목에는 땀을 닦기 위한 수건이 둘러 있다.  그리고 어머님이 마루에 던져 놓으신 밭일 할 때 만 입는 긴 남방과 몸빼 바지를 입었다. 고추 밭은 뜨거운 햇살아래 빨갛게 익은 고추들이 다닥다닥 달려 가지가 무거워 끊어질듯하다. 올해는 고추농사가 잘 되었다고 어머님은 입이 귀에 걸리셨다. 밭에 도착하자마자 한 고랑을 잡으시고 고추를 열심히 따는 모습의 손놀림은 흥에 겨워 춤을 추시는 듯했다. 나도 한 고랑을 따라 삐져나온 가지들을 제치고 천천히 들어갔다.
 고추나무는 내가 앉은키보다 살짝 크다. 그래서 서서 고추를 따면 허리를 120도 정도 굽혀야 하고 쪼그리고 앉아서 따면 또 나뭇가지 윗부분에 있는 고추는 따기 힘들다.
 
 밭고랑사이를 제치고 들어가서 서 있었을 뿐인데 벌써 온몸은 사우나에 들어온 마냥 숨이 컥컥 막혔다. 고추를 하나씩 따서 비료 포대에 담았다. 반 고랑이 지나면 20kg 그램 짜리의 포대에 고추가 절반정도 쌓인다. 그러면 더위로 땀이 흠뻑 젖어 무거워진 내 몸과 포대를 함께 끌고 움직여야 했다. 한 고랑을 다 따고 허리를 들어본다. 두꺼운 스티로폼이 부러지는 소리가 나는 듯했다. 고개를 들어 고추밭 옆을 둘러보았다. 바람 한 점 없어 더위에 지친 나무 가지들조차 움직임이 없었다.
 
 어머님은 어느새 두 고랑을 다 따시고 세 번째 고랑쯤 계시는 듯하다. 고추나무 사이로 어머님의 굽은 등이 보였다. 나도 다시 다른 고랑으로 들어갔다. 너무 힘들어 주저앉고 말았다. 맨바닥에 앉았더니 흙바닥의 찬기운이 엉덩이로 스며들었다. 시원했다. 고추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손을 들어 고추 밑동을 뚝 잡아당겼다.
 “아가~ 그렇게 고추 따면 가지가 다 부러진다.” 헉 언제 보신 걸까.
 “힘들면 잠시 저 나무그늘에 가서 앉아 물 한 모금 마시고 온나”
 “네~”
 대답하기가 무섭게 바로 일어나서 나무 그늘아래 놓고 왔던 참(간식)이 있는 곳으로 갔다.
 보자기를 열어 물병을 먼저 들었다. 얼려온 물이 다 녹아 미지근한 물이 되어 있었다.
 더위에 얼마나 목이 탔는지 컵에 물을 따를 기력도 없었다. 뚜껑을 열자마자 벌컥벌컥 마셨다. 땀으로 젖어 있던 몸빼 바지를 들어 올리고 잠시 앉았다. 그리고 양 옆으로 가림막이 있는 답답한 모자도 휙 벗어 옆자리에 두었다. 바람 한 점 없었던 날인데 어디선가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얼굴에 흐른 땀은 땅에서 올라오는 온기와 바람으로 말라 얼굴은 살짝 당김으로 건조했다. 하지만 땀이 말라가며 얼굴은 시원해졌다. 나무아래 그늘에서 가느다란 바람이 새어 나오는 틈새 바람, 산들바람이었다. 고마운 바람이었다.
 
 



나에게 온 모든 인연들 또한 바람과 같다. 어떤 인연은 차가운 바람처럼 휑하니 왔다 간다. 그 냉기는 정이 가득한 인연이 데워준다. 친밀한 인연들은 가끔 틈새 바람이 불어줘야 한다. 후덥지근한 공기가 가득한 바람이 아닌 온기가 있는 시원한 여름 바다에서 불어오는 자연바람이다. 양팔의 시스루가 살랑거릴 정도의 흔들림이면 좋겠다.
친구와 헤어지고 시린 발을 마사지한다. 찬바람으로 인해 얼음처럼 차가워진 발등을 만지는 손에서부터 냉기는 온몸으로 번지기 시작한다. 그동안 살아 내줬던 날들에 보상이라도 받고 싶은 모양이다. 거실 안에 들어오는 햇살은 나뭇가지를 휘날리는 바람에도 따듯함으로 눈비음하고 있다.
 



그림/이영지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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