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딸 사랑은 딸이 태어나기도 전인 태아일 때부터 시작되었다. 임신을 하고 15주가 되었을 때 초음파를 보던 선생님이 엄마를 닮았을 확률 70%라며 성별에 대한 힌트를 주셨다. 병원을 나와 남편이 대학 때 자주 갔다던 닭곰탕 집에 갔다. 음식이 나오는 동안 나는 생각이 많아졌다. "첫째는 아빠를 많이 닮는다던데…" 딸이라 걱정이 된다는 나의 혼잣말을 듣고 남편은 정색했다. 자신의 얼굴에 여성호르몬만 있으면 굉장히 예쁠 거라며 갑자기 본인 외모에 대한 자부심이 툭 튀어나왔다. 그런 남편을 보며 나는 당황해서 한참을 웃기만 했다. 입덧이 심해서 닭곰탕의 국물만 좀 떠먹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주차를 하던 남편은 "딸이면 명품 가방을 사줘야 할 텐데…"라며 나와 다른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아니 순서가 잘못된 것 같은데? 아내인 나한테 아직 명품 가방 사준 적이 없는데? 임신 때 아내 서운하게 하면 그 기억 평생 가는 거 모르나? 나는 정색하며 분명하게 말했다. 명풍 가방 사주고 싶은 딸 낳아준 아내에게 명품 가방을 사주는 게 먼저라고. 나에게 명풍 가방 사주기 전에는 딸에게 선물할 수 없다고.
연애시절 남편이 나를 바라보던 눈빛이 있다. 표현에 서툴고 말수가 별로 없는 남자의 눈빛을 보며, 내 머리를 쓸어 넘기는 남자의 손길을 느끼며 이 남자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짐작해보곤 했다. 어쩌면 그 짐작은 나의 오해일 수 있다. 2년 정도 연애를 하고 3월에 결혼식을 올렸다. 신혼여행으로 갔던 하와이에서 허니문베이비가 생겼다. 결혼 준비부터 임신까지 우리에게 생긴 변화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임신 초기부터 입덧이 시작되었고 그해 12월 아이가 태어났다. 우리 부부에게는 신혼기간이라고 불릴 시기가 없었다. 결혼과 동시에 예비 부모가 되었고 뱃속의 아이에게 집중했다. 아이가 태어난 후, 남편이 나를 연애시절처럼 바라보았던 적이 있었던가? 기억이 없다.
연애시절 온 신경을 나에게 집중했던 남편의 관심이 이제 딸에게 옮겨갔다. 퇴근한 남편이 씻고 나와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아 딸에게 오늘 재미있는 일이 없었는지 묻는다. 딸과 대화를 나누며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남편의 표정을 나는 싱크대 앞에서 설거지를 하며 지켜본다. 내가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과 남편을 사랑하는 마음을 비교할 수 없다. 살면서 한 번도 나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보다 타인을 사랑하는 마음이 컸던 적이 없다. 아이를 낳아보니 이제야 나를 사랑하는 만큼 내가 낳은 아이들을 사랑한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내가 나보다 아이들을 더 사랑하는지는 모르겠다. 이런 내가 나보다 자식을 더 사랑하는 남편에게 서운한 마음을 갖는다는 게 욕심이겠지. 그래도 남편아, 가끔 떠올려. 딸이 나중에 아빠보다 사랑할 남자가 생길 수도 있다는 걸. 그때 가서 너무 배신감 느끼지 말자.
올해 딸은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계절의 여왕 5월. 아이는 내일 학교에 입학하고 첫 소풍을 갈 예정이다. 두 아이를 학교와 어린이집에 보내고 남편과 점심시간을 맞춰 함께 칼국수에 파전을 먹으러 가고 있다. 기상청에서는 오늘 비가 내리고 내일도 비가 내린다고 예보하고 있다. 학교에서는 비가 와도 계획대로 소풍을 간다고 했다. 식당으로 걸어가며 나는 내일 도시락을 어떻게 챙길지 고민한다. 과일은 딸이 좋아하는 블루베리를 싸줄까? 김밥을 싫어하는데 주먹밥을 싸주면 될까? 딸 친구의 엄마들은 얼마나 예쁜 도시락을 만들어 줄까? 아직 싸지도 않는 내 도시락과 다른 엄마들이 싸 줄 도시락을 비교하며 벌써부터 부담스럽다. 친구들 도시락이 너무 예쁘면 딸이 부러울 텐데. 솜씨 없는 엄마의 도시락을 열어보고 딸이 실망하는 건 아닐까? 그런 내 옆에서 남편은 휴대폰만 들여다보며 학교에서 첫 소풍을 가는데 하필 비가 와서 딸이 속상하겠다고 걱정을 하고 있다.
"아니 오빠 비 걱정 그만하고 우산 좀 들래? 둘이 같이 쓰고 있는 우산 너무 자연스럽게 내가 들고 있거든!"
걱정하면 뭐 내일 날씨가 화창해지나? 어쩔 수 없는 일은 그냥 두고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할래!? 아내도 좀 챙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