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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나은 Oct 22. 2023

취향 없는 남자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현 남편 구 남자 친구(이하 현남구남)는 연애시절 망리단길 자취남이었다. 세속적인 나는 현남구남에게 직접적으로 물어봤다. 원룸은 전세인지 월세인지? 이 동네에서 이런 원룸은 얼마인지? 그 돈은 현남구남이 모은 것인지 부모님의 도움을 받은 것인지. 성인 빠른 걸음으로 10분 정도면 한강에 도착할 수 있고 분위기 좋은 카페와 맛집이 줄지어 있는 곳. 또한 오래된 비디오 대여점과 세탁소, 사진관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고 전통 시장이 잘 형성되어 있다. 나도 이런 핫플레이스에 혼자 월세가 아닌 전세로 살아 보고 싶었다. 그래서 현남구남이 부러웠다. 부모님 집은 서울에서 가장 집값이 싼 변두리에 위치해 있었고 나는 그곳의 방 한 칸에 얹혀살고 있었으니까.  망리단길이 마음에 들었다. 퇴근 후에도 주말에도 주로 홍대와 합정 그리고 망원동을 뱅뱅뱅 돌며 데이트를 이어갔다. 맛집과 멋집이 많은 와중에 쉼 없이 새로운 무언가가 생겨나고 있었다. 가보고 싶은 식당도 카페도 많았는데 정작 이 동네에 살고 있는 주민이 나를 데려가는 곳은 한정적이었다. 즉석우동집 또는 기사식당. 다른 사람들은 멀리서 부러 시간을 내어 찾아와 대기를 해서라도 찾는 식당이나 카페엔 관심이 없어 보였다. 이 남자 나에게 쓰는 돈이 아까운가? 기사식당에서 먹는 돼지불백이 맛이 없는 건 아니지만, 한식을 좋아하긴 하는데 이젠 지겹다. 그러자 전에 만났던 사람들과 비교가 되기도 했다. 'X를 만나면서 새로 알게 된 맛집이 많았는데 그 식당 분위기도 좋았는데...' 헤어진 사람까지 소환하게 되다니 더 이상 이대론 안 되겠다. 내가 나서는 수밖에! 나는 현남구남에게 기사식당만 데려가는 남자 친구라며 구박했다. 현남구남은 그 식당이 그래 보여도 식신원정대에 나온 맛집이라고 항변했다. 방송 출연 한 번, 그게 언제 적 이야기인지. 그동안 숨겨왔던 모습을 드러내기로 했다. 내가 얼마나 먹는 일에 진심인지를.

데이트 장소 선택권을 내가 가져왔다. 주기적으로 떠올라 적어도 분기에 한 번씩은 찾는 단골맛집, 직장동료들과 평일 점심시간에 자주 찾는 식당을 현남구남에게 소개했다. 현남구남을 식당에 데려가면 꼭 물어봤다. 전에 방문한 적이 있는지. 그럴 때마다 현남구남은 처음이라고 답했다. 그제야 알게 되었다. 이 사람은 유명 맛집에 나를 데려가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그냥 아는 곳이 없어서 나를 그곳에 데려갈 수 없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더욱 알려줘야지. 세상에 이렇게 맛집이 많다는 걸. 아직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음식점을 찾거나 한 번쯤 가보고 싶은 반짝여 보이는 새로 생긴 장소에 현남구남을 데려갔다. 심지어 현남구남은 나를 만나 처음으로 여권을 만들었다. 30년 넘게 살면서 한 번도 해외여행은 해 본 적 없는 남자. 이것은 레어템이 아닌가? 이런 사람 일부러 찾으려고 해도 못 찾겠다.

'역시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어'라고 생각하는 식당이나 '여긴 생각보다 별로네. 앞으론 오지 않겠어!'라고 다짐하는 식당이나 현남구남의 반응은 별 차이가 없다. 내가 시킨 메뉴를 군말 없이 잘 먹었다. 현남구남은 나에게 새롭고, 신선한 자극을 주는 일은 거의 없지만 내가 좋아하는 장소에 찾아가고 직관적으로 끌리는 무언가를 새롭게 경험할 때 함께 하기 좋은 메이트이다. 가끔 너무 피곤해서 현남구남이 나를 대신해 마음에 쏙 드는 장소를 떠올려주기 바라는 날이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우리는 결혼을 하고 신혼집을 망원동에 얻었다. 당시 망원동의 식당과 카페 중 가보지 않은 곳은 없다. 복숭아의 계절이 오니 스몰커피에서 마시던 복숭아주스가 먹고 싶다. 커피와 계절과일 주스 중 어느 것도 포기할 수 없어 커피를 먼저 호로록 마시고 계절주스까지 주문하곤 했던 카페. 코브라파스타 클럽은 여전히 예약하기 여러 운가? 알람을 맞춰고 인스타 예약 DM을 보내고 예약에 성공했는지 기다리던 순간이 자주 있었는데 파스타가브라스와 블루베리크림치즈피자도 먹고 싶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맛. 내가 아는 맛. 현남구남과 함께 해가 진 후 브롬톤을 타고 바람을 맞으며 찾아가던 빈브라더스의 라떼도 다시 마시고 싶다. 망원동은 여전히 주택을 개조해 새로운 가게들이 문을 열고 있을까? 애정하던 망원동 신혼집은 계약기간인 2년을 꽉 채우지 못하고 떠나왔다. 살면서 서울을 떠나 타 지역에서 살게 될 거라고 단 한 번도 생각한 적 없다. 태어나고 자란 도시. 그 도시는 나에게 당연함이었고 첫사랑이었다. 평생을 함께 할 거라 생각해, 온 마음으로 품고 사랑했다. 이렇게 이별하게 될 줄 알았더라면 마음의 한 조각을 비워두었을 텐데. 연애기간 2년, 신혼집 2년 고작 4년의 추억이 있는 망원동도 이렇게 그리운데 오랫동안 살았던 동네는 말해 뭐 하겠어. 서울에 남아 있는 나의 오랜 친구들과 마음이 볶일 때마다 찾던 미술관은 또 어떻고.

"오늘 어린이집 친구 엄마들 만났는데 계속 마라탕 이야기하더라. 난 마라탕 맛있는 거 잘 모르겠던데. 어반브릭스에 마라탕 맛집 있데, 오빠 마라탕 먹어봤어?"

"아니. 자기가 안 데려가줬잖아."

아 맞다. 우리 남편 내가 없으면 부대찌개 아니면 맥도널드 햄버거 그리고 라면. 그렇게 셋 중에 하나 돌아가면서 먹는 남자였지.

"마라탕 주문해 볼까? 일단 우리는 맵찔이니까 신라면 맵기 단계로?"

남편에게 오늘도 처음으로 새로운 경험을 선물한다. 돈은 남편이 지불하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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