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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나은 Sep 24. 2023

캠핑이야, 나야? 선택해!

남편을 처음 만난 건 직장동료들과 함께 가입한 자전거 동호회 모임이다. 세상에 태어나 서른한 번째 생일을 보낸 후였다. 연애도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소개팅을 할 만큼 했다. 나와 다른 성으로 살고 있는 인간을 이제 조금은 안다고 생각했다. 평균 수명의 절반도 채우지 못한 나이로 인생이 뭔지 어느 정도 윤곽이 보이는 것 같다고 교만하던 시절이었다. 어쩌면 그랬기 때문에 한 남자와 결혼이라는 걸 하고 아이를 낳았는지도 모르겠다. 자전거를 타며 썸을 타던 우리는 곧 연애를 시작했다. 동시에 자전거에 배낭을 매달고 캠핑도 시작했다. 가을이었다. 첫 캠핑지였던 여주의 강천섬은 파란 하늘을 빼면 전부 노란 물결이었다. 우리가 챙겨 온 텐트 역시 노란색이었다. 나무 사이에 파란 해먹을 걸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은행잎을 맞으며 함께 해먹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대로 시간이 잠깐 멈춰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남편은 그날 이후 사계절 중 가을을 가장 좋아하게 되었다. 남자친구와 함께 하는 첫 캠핑은 씻을 곳이 없어 물티슈로 얼굴과 발을 닦고 잠이 들어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흙에서 태어난 내가 뿌리가 뽑힌 채 도시에 던져서 메마른 시간을 보내다가 내가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온 느낌을 받았다. 그래 나는 원래 이렇게 잘 웃고 작은 일에도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었지.

자전거에 싣을 수 있는 배낭에 넣을 텐트는 크지 않았다. 성인 둘이 누우면 더 이상 공간이 없는 작은 텐트. 흙바닥 위 얇은 텐트, 그 속에 바람을 넣은 매트를 깔고 담요를 덮었다. 그 위에서 애벌레처럼 침낭에 쏙 들어간 채 잠을 잔다. 잠들기 전에 화장실을 한번 더 다녀올까 말까 고민했다. 화장실에 가려면 침낭에서 나와 외투를 입고 맨발에 신발을 신고 텐트 밖으로 나가 찬 바람을 맞아야 한다. 그냥 참는다. 남자친구는 화장실에 갔다. 화장실에서 나온 남자친구가 하늘에 별을 보며 감탄하는 소리가 들린다. 나에게도 나와서 서울에서 보지 못할 별을 좀 보라고 한다. 침낭 속 애벌레 상태로 텐트를 살짝 열고 얼굴만 빼꼼 내밀어 잠깐 별을 볼 뿐이다. 보라고 하니까 보는 시늉은 하는데 남자 친구 곁에 함께 서서 오래 바라볼 의지는 없다. 별이 예쁘긴 예쁘네. 잠들기 전까지 뒤척일 때마다 매트에서 뽀득뽀득 소리가 난다. 마치 수영장에서 사용하는 서핑튜브 위에서 자는 느낌. 자세가 좋지 않아(거북목, 굽은 등과 전굴 된 허리 그리고 말린 어깨) 통증 때문에 정형외과에 제 발로 찾아가 도수치료를 받고 있던 나에게 좋은 잠자리는 아니다. 기껏 치료에 시간과 돈을 투자해 통증이 사라지려는 자세가 다시 엉망이 되고 있다.

남자 친구를 만나기 전 주말엔 인문학 수업을 듣기도 하고 뮤지컬을 보러 다니고 콘서트와 록페스티벌도 다녔다. 캠핑이 싫은 건 아니다. <주말엔 숲으로>라는 책도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매주 주말에 캠핑만 하는 건 내가 원하는 주말이 아니다. 나는 캠핑보다 하고 싶고 게 있다. 많이 있다. 드립백으로 내린 따뜻한 아메리카노보다는 카페에 가서 마시는 얼음이 짤랑이는 라테를 더 좋아한다. 불편한 잠자리에서 자다가 덥거나 추워서 잠이 깨는 것보다 호텔 특유의 새 하얀 침구에 누워 최적의 온도에서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는 걸 좋아한다. 무엇보다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거나 룸서비스를 받아서 남이 해주는 음식 먹기를 좋아한다. 캠핑장에선 요리가 필수다. 간단하게 밀키트를 사용한다고 해도 아침에 먹은 식기를 설거지하고 나면 또 점심을 준비해야 한다. 이제 알겠다. 캠핑과 여행은 좀 다르다. 나는 여행을 사랑한다. 결국 나는 남자친구에게 양단간에 결정을 내리라고 했다.

"캠핑이야 나야? 선택해!"

그 순간 남자 친구가 캠핑의 ㅋ만 꺼내도 진짜 이 관계를 끝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나의 기세를 느꼈던 걸까? 남자 친구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캠핑 대신 나를 선택했다. 두 아이를 낳고 키우는 지금에 와서 과거를 떠올려보면 '그래 그때 우리가 헤어질 수도 있었겠구나. 그때 헤어졌어야 했다.'라고 생각하는 찰나가 있다. 예민하고 게으른 아내가 싫다는 캠핑이 여전히 좋은 남편. 아내에게 말하지 않고 사서 모아 온 캠핑 장비를 지하 세대 창고에 보관하고 아니 숨겨놓고 있었다. 세대별로 주어진 작은 공간의 창고 열쇠는 남편이 가지고 있고 나는 5년 넘에 이 아파트에 살면서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 아이들을 재우고 남편이 창고에 내려가더니 그동안 사 모아 온 캠핑 장비를 꺼내왔다. 그런 남편이 꼴 보기 싫어서 내 방으로 들어가 책을 읽는다. 거실에서 장비를 세팅하는 소리가 들린다. 정수기에 물을 뜨러 거실에 나갔다가 기가 찼다. 이걸 다 언제 산 거야? 이게 다 얼마야? 일 년에 한 번 갈까 말까 한 캠핑을 위해 얼마를 쓴 거야? 아니 이렇게 돈을 쓰면서 나에게는 생활비를 줄여야 한다고 한 거야? 이 돈이면 둘째를 임신하고 태교 여행으로 갔던 괌에서 내가 갖고 싶다고 했던 팔찌, 나중에 사준 다고 했던 그 팔찌 사고도 남았을 것 같다. 나는 팔찌 사면 창고에 처박아 두는 대신 매일 차고 다닐 건데.

계절은 입추를 지나 처서로 나아가고 있다. 다시 돌고 돌아 가을이 온다. 여전히 더운 한밤 중 불어오는 바람에서 가을의 기운이 느껴진다. 작년 봄엔 둘째가 태어난 후 넷이서 첫 캠핑을 갔다. 나와 함께 필라테스를 하는 언니가 마침 캠핑장을 운영하고 있었고 선심 쓰듯 남편을 대신해 캠핑장을 예약했다. 벚꽃캠핑을 기대했지만 산과 가까운 캠핑장은 도시보다 기온이 낮아 벚꽃이 아직 발화하지 않았다. 나 혼자 집에 있고 남편이 아이 둘을 데리고 캠핑장에 가면 얼마나 좋을까? 집에서 쉬고 싶던 나는 캠핑장에 도착해서부터 두통이 찾아왔다. 급체를 했는지 저녁을 먹은 후 모달불을 피우고 불멍을 하던 중 먹은 것을 입 밖으로 다 쏟아냈다. 이렇게까지 캠핑 가기 싫어하는 아내를 끌고 캠핑하고 싶은 남편, 여러분 어떤데요? 남편은 올해 가을 캠핑을 준비한다.

남편과 시간이 맞아 오랜만에 창원으로 이동해서 점심을 먹었다. 모처럼 혼밥이 아닌 둘이 먹는 밥이니 사람수보다 많은 메뉴를 주문한다. 피자 하나, 라쟈냐 하나, 샐러드까지 시킨다. 음식이 나오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남편의 전화벨이 울린다. 남편은 업무상 전화를 받고 전화를 거는 일이 많다. 평소 말이 없는 사람인데 업무로 통화하는 시간이 길다. 주말에도 예외는 아니다. 통화 상대방의 말은 들을 수 없지만 남편의 대답을 듣는 것만으로도 불편하다. 당사자인 남편은 나보다 더스트레스가 크겠지? 남편은 평소 술도 잘 마시지 않는다. 담배는 나를 만나기 전에 끊었다고 했다. 남편은 스트레스를 어떻게 풀고 있는 걸까? 퇴근하고 집에 오면 바로 육아 출근하는 남편. 잠깐 남편이 안쓰럽다. 애들 재우고 소파와 한 몸이 되어 유튜브만 보며 시간을 죽이는 남편에게 잔소리 그만해야겠다. 에이, 그래 뭐 취향이 없는 줄 알았던 남자가 캠핑이 그렇게 가고 싶다는데 한번 가주자. 남편이 통화를 하는 동안 먼저 음식을 먹으며 생각했다. 그런데 꼭 장조림 같은 소고기가 들어간 이 피자 너무 맛있다. 남편이 얼른 통화가 끝내고 음식이 따뜻할 때 먹으면 좋겠다. 배가 점점 차오르는데 아직 절반 이상 남은 퀴노아 샐러드 맛있다. 그만 수저를 내려놓아야 하는데 맛있는 음식을 남겨야 하다니 아까워 몇 수저를 더 떠먹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나는 또 급체했다. 너무 많이 먹어서일까? 불편한 마음으로 먹어서일까? 모쪼록 이번 가을 캠핑은 네 식구 중 아무도 아프지 않고 무탈하게 보내고 오면 좋겠다. 남편에게 지금 다시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할까? "캠핑이야 나야?" 그냥 선택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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