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타의 시간
가계부를 쓰시나요? 가계부를 쓰려면 일단 고정지출과 변동지출을 분리합니다. 매달 똑같이 나가는 비용. 예를 들면 아이 학원비, 주택대출, 정수기렌탈비, 보험료, 적금 같은 비용이요. 이 지출은 가계부에 한 번만 적어두면 돼요. 매달 기입할 필요는 없지요. 나머지 변동지출만 매일 적으면 돼요. 오늘 먹은 커피값, 점심값, 쇼핑 금액, 소아과진료액, 축의금, 부모님 생일 선물 등등. 그 달의 수입에서 고정지출 비용을 빼면 그 달의 사용할 수 있는 생활비가 남아요. 그 금액을 30일 또는 31일로 나누면 하루에 지출할 수 있는 금액이 나와요.
며칠 전 아이들을 재운 뒤 남편과 둘이서 오랜만에 근래의 우리 가족 고정지출비용이 얼마인지 계산해 보았어요. 아이들이 커가면서 전보다 고정지출비용이 많아졌다는 걸 알면서도 정확하게 계산해 보지 않았어요. 그래서인지 요즘 매달 카드값이 모자라 비상용 통장의 잔고를 빼내고 있었어요. 그 잔고마저 바닥을 보이자 더는 미룰 수 없어서 다시 계산기를 꺼내 들었지요. 남편은 생활비를 줄여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나는 도대체 어느 항목을 아껴야 하는지 떠오르지 않았고요. 결국은 외식이나 배달음식을 줄이고 나에게 밥상을 차리라는 말로 들렸어요. 요리를 하게 되면 식재료를 구입하고 손질하는 시간이 늘어나니 주방에서 일하는 시간이 늘 수밖에 없어요. 다시 말해 나의 노동시간이 지금보다 더 늘어난다는 말이었죠.
남편은 생각보다 매달 나가는 고정비용이 많다는 사실에 현실을 자각하는 시간(현타)이 왔어요. 남들처럼 명품 가방을 사거나 해외여행을 가는 것도 아닌데도 이렇게나 나가야 할 돈이 많다는 사실에 씁쓸해했지요. 현대사회 남들과 똑같지는 않더라도 비슷한 수준으로 따라가려만 해도 해야 할 일도 많고 갖춰야 할 것도 많네요. 참 바쁘고 피곤해요.
“도대체 다른 집들은 매달 얼마씩 월급을 받는 거야?”
그런 남편과 달리 나는 매일 쓸 수 있는 생활비가 어림잡아 짐작했던 금액보다 적다는 현실에 현타의 시간이 왔어요. 하루에 대략 6만 원을 쓸 수 있더라고요. 점심 혼밥 1만 원. 커피 5천 원. 저녁 네 식구 3만 원. 그러고 나면 1만 5천 원이 남다니요. 아이들이 아프면 소아과 진료를 받고 약국도 들여야 하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제철과일도 사야 하는데, 남편은 잘 먹지 않지만 아이들과 나는 케이크도 좋아하는데 말이죠.
아이들 교육비를 줄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미래를 위한 적금이나 보험, 연금을 줄이고 싶지도 않고 저녁식사 비용을 줄여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 들 일 수밖에 없네요. 서로의 의견대립을 끝내고 합의를 이루어 앞으로 나아가는 첫 번째 조건은 상대가 제기한 문제를 받아들이고 변화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태도인 것 같아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나의 생활습관을 고집한다면 긍정적인 변화는 없을 거예요. 몸에도 좋지 않은 커피를 줄이고 반찬가게를 이용하는 방법을 택해야겠어요. 오늘의 부부싸움은 나의 완패네요.
현미와 보리를 섞은 잡곡밥 취사 버튼을 눌러요. 반찬가게에서 산 시락국을 데우고 어묵볶음과 메추리알장조림을 꺼내요. 냉동 치킨너겟을 달궈진 팬에 넣고 중불로 익혀요. 뽀로로가 그려진 비엔나소시지를 끓는 물에 데처요. 저녁을 먹고 아이들과 아내가 딱딱한 복숭아(딱복)를 먹는 동안 남편은 서둘러 설거지를 해요. 남편의 일이 많아진 뒤로 설거지는 아내 담당으로 변경했는데 식비를 줄이기 위해 설거지 노동은 자연스럽게 남편이 짊어져주네요. 감기약을 먹은 아이들은 순서대로 성별이 같은 어른과 짝이 되어 씻어요. 아이들이 잠들고 남편은 유튜브로 캠핑 채널을 보네요. 슬쩍 그 옆에 앉아보아요.
“내가 요즘 사고 싶은 텐트가 세 개 있는데…"
앗, 이런 낭패예요. 남편에게 선공을 당했네요.
“(텐트) 얘기하지 마. 나는 전부터 장화가 사고 싶은데, 어떤 컬러가 괜찮아?”
“배송받으면 장마 다 끝나 있는 거 아니야?”
남편의 말을 끊고 내가 사고 싶은 장화의 사진을 보여줘요. 각자 서로가 사고 싶은 품목이 지금 얼마나 필요한지에 대한 구구절절한 설득을 이어가요. 이때 성공확률을 높이려면 사고 싶은 품목을 많이 이야기해야 해요. '이것도 사고 싶고 저것도 사고 싶은데 다른 건 내가 꾹 참고 진짜 이거 딱 하나만 살게 응? 그것도 안돼?' 그런 동정표를 얻어내야 해요. 그리고 가격이 비싼 물건일수록 성공확률은 떨어져요. 또 다른 방법은 평소엔 무소유의 삶을 살다가 정말 오랜만에 갖고 싶은 걸 말하는 거예요. 사고 싶은 게 많은 나는 이 방법을 쓸 수 없어요. 주로 남편이 사용하는 방법이죠. 연애 때는 누가 누구를 더 좋아하는지에 따라 갑과 을로 나누어지기도 했지만 결혼 후 부부가 된 우리는 이제 갑과 을은 중요하지 않아요. 누가 좀 더 마음을 짠하게 만드는지, 누가 좀 더 안쓰러운 마음을 불러일으키는지가 원하는 걸 얻어내는 포인트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