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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llow Duck Oct 04. 2022

우리는 실패했을까?

'나의 도시' 시리즈 - 베를린 이야기

  주소는 쇼세스트라세(Chausseestrasse) 126. 베를린의 중심인 미테(Mitte) 지역에 있지만 공원이 넘치는 이 도시에서는 김박 씨 같은 공원인지라 무심코 스쳐 갈 가능성이 높다하지만 이 평범한 공원에 입장하는 내 마음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설레고 심장이 뛰고 살짝 긴장되어 땀까지 난다사실 이곳은 공동묘지다공동묘지도 그냥 공동묘지가 아닌헤겔하이네 뮐러하인리히 만 등 독일이 배출한 철학자작가 및 문화 인사들의 묘비가 모여 있는 곳이다그리고 이곳에 내가 보고자 하는 그분이 있다

   철문을 열고 묘지에 들어서자 참새인지 직박구리인지 모를 째엑~짹 소리가 난다봄바람에 챠르르르 흔들리는 나무 소리도 나고 저 멀리서 묘지 관리사가 잔디를 깎는지 우우우웅기계 소리도 난다거기에 묘비 사이로 샤각샤각 흙길을 밟는 내 발소리가 더해진다그 소리들 끝에 아주 조용히 그가 모습을 드러낸다어떤 장식도 없이 묵직하고 진중한 큰 돌의 모습으로. 4월 말의 순진한 햇빛이 빚어낸 나무의 그림자가 그 돌 위에서 춤춘다역시나 묵직하고 진중하고 아주 조용히나는 지금 독일의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와 그의 아내 헬레네(Helene)의 묘비 앞에 있다현실 같지 않다신이시여진정 내가 실제로 그의 묘비 앞에 있단 말입니까근 1년을 베를린에서 살았건만 그때는 한 번도 오지 않더니네덜란드에서 사는 지금아이의 학교 봄 방학을 맞아 베를린으로 여행하러 온 신분이 되어서야 보게 되는 이 아이러니라니

 

  큰 돌에 새겨진 활자를 한 자 한 자 읽는다. B.e.r.t.o.l.t B.r.e.c.h.t. 설렘에 뛰던 심장은 이내 울컥하는 감정으로 옮겨간다쿨한 척 눈을 깜빡이며 눈가의 뜨거움에게 주책바가지라고 놀린다이건 유럽의 한 시골 도시에서 길을 걷는데 어디선가 맥락 없이 어렸을 때 무척이나 좋아해서 흥얼거렸던 송창식의 참새의 하루’ 노래가 흘러나오자 깜짝 놀라 토끼 눈으로 아침이밝는구나아~’를 따라 부르며 눈물을 흘리는 감정과도 같은 감정이다덕질의 감정이다난 어렸을 때 퀸과 송창식을 덕질했고, 20대 때 아일랜드 록밴드 U2와 브레히트의 희곡을 덕질했다

  그의 묘비 앞에 라이터와 팬과 조약돌과 들꽃이 수줍게 있다나도 뭔가 놓고 싶어서 주섬주섬 가방을 뒤지니 마침 큐브형 초콜릿이 있다초콜릿을 놓고 그 앞에 앉아 중얼중얼 대화를 시도한다그거 알아요당신 때문에 개고생 한 거대학원 때 당신 작품으로 논문을 썼다가 교수들에게 엄청 깨졌어요심사 때 교수 8명이 반으로 갈려 제 작품이 좋다 안 좋다 싸우는 걸 봐야 했죠한국으로 돌아와 맡은 첫 작품 억척 어멈은 아직도 제 디자이너 인생에 오류로 남아 있어요당신의 여성관은 아주 싫었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희곡을 좋아했어요그 양가감정과 싸워야 했죠잘 만들기 어렵다는 당신 작품에 대해 도전 정신도 불타올랐어요그런데 지금은 당신의 작품은커녕 공연도 거의 안 보네요젊은 시절의 치기일까요그 시절 전 정말 진지했는데... 당신 무덤이 있는 이 도시에서 살면 참 좋을 거예요힘들 때마다 당신에게 와서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 테니까요.

  

브레히트의 무덤

  

  내가 처음으로 베를린에 입성한 때는 2010년 겨울이다애인(현 남편)과 함께 자원봉사를 하며 세계 여행을 하는 프로젝트를 끝낸 후 머물 곳을 찾을 때그는 베를린으로 가자고 했다자신이 오랫동안 살던 곳이라 친구도 많고 마음도 편하다고 말이다하지만 이 양반왜 하필 겨울을 택했을까북유럽의 겨울이특히 베를린의 겨울이 악명 높다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굳이 거길?’ 하며 다른 옵션을 들이밀었을 텐데우중충하고 오후 4시면 해가 져서 광합성이 어렵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우울감으로 고생한다는 그 악명을하지만 어찌어찌 잘 버텼고이구동성으로 ‘겨울이 혹독해서 그렇지유럽에서 베를린만 한 도시 찾기 힘들다는 친구들의 말이 진실임을 확인했다물론 뭐야! 1년 중 반이 겨울이잖아어쩌라고!’ 소리치며 항의했지만우리는 베를린을 베이스로 NGO 단체를 만들고 싶었다큰 봉사 단체의 비리들이 속속 터졌을 때라 기존의 단체를 거치지 않고 여행을 통해 바로 지역 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통로를 찾으려 했다그리고 그때 난 당연히 성공에 대해 믿어 의심치 않았다단체를 만들려면 6명 이상의 파트너를 찾아야 하고 얼마 이상의 설립금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우린 왜 그리 순진했던가생각해 보면 무언가를 추진했던 매 순간난 당연히 그렇게 될 거라 확신했다유학 시절반드시 브로드웨이 무대 디자이너가 될 거라 확신했고한국에서 활동할 때는 무대 디자인상을 받을 거라 확신했고아이를 데리고 유럽을 돌아다닐 때는 자연 속에 집을 짓고 커뮤니티를 만들 거라 확신했다그 확신은 모두 이루어지지 않았다인간의 확신이란 때때로 얼마나 허무한가.  

 

  묘지 바로 옆브레히트가 죽기 전까지 헬레네와 살았던 아파트는 현재 뮤지움이 되어 사람들을 맞이한다난 투어를 신청했고지금 가이드가 이끄는 대로 그 아파트를 보고 있다참여자는 나 외에 독일 남자 한 명뿐이다온갖 책이 꽂혀 있는 그의 서재를 거쳐 큰 거실로 간다가이드와 독일 남자는 독일어로 떠들고어차피 알아듣지 못하는 난 거실 중앙에 서서 눈을 감고 마치 우디 앨런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처럼 그 시절로 날아간다거실 한쪽 책상에서 그가 타이프 라이터로 희곡을 쓰고 옆에서 극단 사람들이 극장 모델을 앞에 두고 열렬히 토론한다모델 앞에서 무대를 설명하는 사람이 나라면 좋겠다거실 옆, 58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죽음을 맞이한 그 침실은 의외로 작고 심플해서 처연하기까지 하다헬레네가 꾸몄다는 응접실은 훔치고 싶을 정도로 세련됐다투어는 끝났지만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기가 어렵다차마 떠나지 못하고 다시 그의 묘비로 간다.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란 닳고 닳은 문장을 실현한다묘비 앞에서 다시 그에게 말을 건다고마워요좋은 작품 많이 써 줘서당신 앞에 있으니 그 시절 그 꿈이 떠올라요이렇게 상기하니 좋네요언제 또 베를린에 오게 될까요그때까지 안녕그렇게 난 그 시절 내 꿈과 작별한다

 

베를린 돔 (그림: 옐로우덕)

  

  생각하면 아련한 도시가 있고 그리운 도시가 있고 가슴 설레는 도시가 있는 동시에 치가 떨리는 도시가 있고 아무 감흥이 없는 도시가 있고 슬픈 도시도 있다내게 베를린은 아쉬운 도시다이룰 듯했으나 이루지 못해서 아쉬운 도시. ‘어디든 그런 것 아니겠냐’ 하겠지만 누구든 뭔가를 이룰 수 있을 것 같은 곳에서 그러지 못했다는그래서 왠지 모를 굴욕과 열패감으로 자존심 상하는 도시하지만 한편으로는 워낙 나 같은 사람이 몰려드는 곳이기에 어찌어찌 살아남고 여차저차 이루어도 과연 지금과 크게 다를까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도시어찌 됐든 마음 한쪽 남아있는 미련을 부여잡게 되는그저 아쉬운 도시

모르겠다한 도시에 대한 로망은 로망으로 남겨두는 게 좋을지내가 아는 베를린을 지금 다시 겪는다면 그 로망이 사라질지그 실망에 대해 난 준비가 되어 있는지그럼에도 계속 중얼거린다. ‘이 좋은 곳을 두고 말이지…’ 그러게 말이다도대체 뭐 하는 거야이 좋은 곳을 두고지금 어디서 뭐 하고 있는 거냐고

  공동묘지를 나와 걸으며 난 내가 이루지 못한 것들을 생각한다난 브로드웨이 디자이너가 되지 못했으며, NGO 단체를 만들지 못했으며자연 속의 공동체를 만들지 못했으며내 창작품으로 돈을 벌지 못했다더불어 수많은 만약을 생각한다그때 뉴욕에 남았더라면그때 베를린에서 아파트를 구했더라면그때 포르투갈에서 땅을 샀더라면... 질문한다우린 과연 실패했을까베를린너에게 묻는다과연 우리가 실패한 거니


  2022년 봄베를린의 쇼세스트라쎄에는 왜소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 한 한국인 여성이 있었다그 많은 만약들을 뒤로하고 그녀는 나아갔다길이 여전히 뻗어 있기에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그 여성이 이렇게 모든 걸 기록하려고 안달하는 건 베를린에 던진 이 질문에 아니라고 답을 하고 싶기 때문이다.  


베를린 미테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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