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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llow Duck Jan 19. 2019

질문 열셋: 외국인 남편 어때요?

이 남자와 같이 살려면 최면이 필요하지.

피터팬 같은 이 사람.
부부 관계에 있어 평행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뭘까?


길 위에서 요가를. 베를린에서.


# 2012년 11월 19일, 그날의 일기


신랑아. 나도 알아. 당신 맥가이버병 있는 거. 맥가이버처럼 원시적인 방법으로 이것저것 뚝딱뚝딱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지. 하지만 맥가이버도 맥가이버 나름이지. 당신은 그냥 카밀일 뿐이잖아. 실제로 많은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닌데, 꼴랑 인터넷과 책에서 주워 모은 지식으로 여기저기 마구 설치고 다니면 소동이 일어나는 건 당연하지 않아?

맞아. 그 집, 빈 집이야. 오랫동안 아무도 안 살아서 벽이 다 허물어졌고 우거진 잡초가 마당을 다 덮고 있지. 또 그 집이 아궁이도 있는 옛날 시골집이라 당신 구미에 딱 맞을 거라는 거 알아. 하지만! 아무리 빈 집이라 해도 주인이 있는 집이라고! 그냥 쳐들어 가서 이것저것 실험한답시고 아궁이에 불 때고, 가마솥에 인도식 빵인 난을 만들고, 무너진 벽을 세운답시고 진흙과 지푸라기를 섞어 벽을 메꾸기 시작하면 동네 어르신들께서 안 놀래시겠냐고! 그것도 한국 사람이 아닌 외국 사람이 말이지! 빈 집에서 갑자기 연기가 폴폴 나고 퍽퍽 삽으로 땅 파는 소리가 나면 당연히 ‘뭔 일이여?’하며 어르신이 몰릴 텐데, 한국말도 능숙하지 않은 당신이 어르신들 사투리로 말씀하시는 거에 그냥 씨익 웃음으로 답한다고 다 해결되는 게 아니라고. 

결국 이장님 귀에까지 들어갔잖아! 시골에서 이장님 파워가 얼마나 센 줄 알아? 아까 이장님한테 전화 왔어. 도대체 빈 집에서 뭘 했냐고. 뭘 몰라서 그랬다고, 앞으로 단단히 주의 주겠다고 싹싹 빌었어. 인심 좋은 할머니들이야 고구마도 가져다주시지만 마을 분들 모두가 그런 건 아니야, 자기야! 

아이고~ 순진한 우리 자기야아~! 우리 가족 모두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작지만 멋진 집을 만드는 게 꿈인 자기야. 미리 연습하는 건 좋은데 제발 상황 봐 가면서 하자, 응? 나중에 진짜로 우리 집을 지을 때 내가 팔 걷어붙이고 도끼로 나무 팍팍 찍으며 일할 테니 그때까지만 제발 진정해주라, 응? 미안하지만 이제부터 그 빈 집엔 출입 금지야! 

그래도 이 말 안 하면 섭섭해하겠지? 쩝, 사랑해. 사랑한다고! 하아......
두 시선.


# 철없는 신랑 데리고 살려니 별일이 다 있다.


미루를 뱃속에 품던 임신 막달, 우리는 전북 진안에서 살았다. 그리고 카밀은 저렇게 소동을 피웠다. 전화기 너머 퉁명스러운 이장님의 목소리에 읍 조리듯 통화한 후 난 눈 감으며 주문을 걸었다.

- 난 평강공주다. 난 평강공주다. 난 평강공주다. 카밀은 온달이고, 난 카밀을 장군으로 만들 테다!


2009년 여름, 난 카밀을 카우치서핑을 통해 만났다. 한국을 여행 중이던 카밀을 내가 호스트 한 것이다. 대학로에서 내가 디자인한 공연도 보여주고 저녁도 먹는 등 즐거운 시간을 보낸 후 다음 행선지로 가는 그에게 난 잘 살라며 행운을 빌어주었다. 3개월 후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다시 만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 채. 그때 난 국제 아동극 축제에 참가 중이었고 카밀은 채리티 트레블의 첫 행선지로 왔던 상태였다. SNS로 이 사실을 안 우리는 소피아 성당 앞에서 만나 반나절 정신없이 수다를 떨었다. 그때 그는 자신의 자원봉사여행 프로젝트 계획을 침 튀겨가며 설명했다. 이에 반한 난 3개월 후 여러 이유로 공연 스케줄이 모두 캔슬되자 그에게 채리티 트레블 파트너를 제안했고 그는 흔쾌히 오케이를 날렸다. 그 길로 난 모든 걸 정리하고 케냐 나이로비로 날아갔다. 나이로비 공항 문이 열렸을 때 활짝 웃으며 서 있던 그의 미소가 아직도 생생하다. 그 이후로 우리는 역사를 같이했다. 우리의 만남은 웬만한 영화보다 드라마틱하다. 


그때를 생각하면 참 신기하다. 그때 내가 반했던 그의 모습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자신감 넘치고, 열정적이며 확고한 신념으로 자신의 이상을 향해 일을 추진하던 어른스러운 그 모습은 언제 저렇게 빈 시골집에 쳐들어가 아궁이에 불을 때는 철없는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바뀌었을까? ‘Boys will be boys.’라는 말처럼 결국 남자는 나이 들어도 ‘어쩔 수 없는’ 어린애일까? 내 주변의 모든 기혼 여성이 하나 같이 입을 모아 말하는 것처럼, 결혼 전엔 아무리 잘났더라도 결혼하면 큰아들로 전락하는 걸까? 


아무리 웬수여도 우리 서방님.


# 사는 데 있어 최면은 필요하다.


최면은 필수다. 안 그러면 콩깍지 쓰이는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카밀을 물끄러미 보고 있으면 아직 스스로 파랑새라는 걸 자각 못 한 한 마리의 작은 파랑새가 하늘로 날지 못해 안달하며 그 작은 날개를 파닥거리는 것 같다. 미루에게 보이는 광대 같은 행동과 환한 웃음 뒤로, 작은 충격 하나에도 인간이 행할 수 있는 모든 모순을 바로 터뜨릴 도시락 폭탄을 품은 사람 같다. 오호통재라, 왜 난 항상 이렇게 너무나도 인간적인 모순에 매료된단 말이냐! 내 세상에서 그는 충분히 멋진 남자일 수 있지만 현실의 세상에선 많이 부족한 남자일 수 있다. 그때 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내가 평강공주라고 최면을 걸었었다. 이른바 평강공주 콤플렉스. 


하지만 이제 난 평강공주이기를 거부한다. 온달 장군은 그가 스스로 되는 것이지 내가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남자 만나 팔자 피는 신데렐라도 거부한다. 부부관계에 있어 난 각자의 슈퍼 파워로 타노스에 대항하는 어벤저스이기를 희망한다. 카밀과 나, 서로 손잡고 채리티 트레블을 계획했던 파트너로서 누가 누구를 무언가로 만드는 일 없이, 누구 하나 ‘희생’하는 일 없이, 아니 ‘희생’이라 부를지언정 그 희생의 시소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평행을 이루어 같이 갈 수 있는 듀오가 되길 희망한다. 

방법은 무엇일까?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 사람인 난 오늘도 또 노력하고 배워야 한다. 이래서 결혼이 아주 힘든 대명제인가 보다. 결혼 선배님들 모두 나에게 마음을 내려놓으면 편하다고 조언하셨지만, 이 부분에 있어서 투쟁을 계속하고 싶은 걸 보면 난 아직 힘이 남아있는 걸까? 


그래도 카밀이 벌인 저 소동은 귀엽다. 어르신들이 마을 회관에 모여 소주잔을 나누며 ‘즈으~기 강가 옆에 사는 그 외국인 청년 있자나잉?’하고 화두를 꺼내 몇 번 잘근잘근 씹을 수 있는 술안주에 불과하다.

- 아따, 네덜란드 머시기 그짝 동네에선 그냥 막 남의 집에 들어가도 되는 갑지잉?

- 글게 말여잉. 쪼께 거시기하네!

- 나가 그 안 사람한테 잘 말해놨응께, 앞으로 그런 일은 없을 것이여잉.

어르신들의 귀여운 대화가 내 귀에까지 들리는 것 같다. 이 정도의 자기 최면은 충분히 할 수 있다. 


외국인 남편 어떻냐고? 그놈이 다 그놈이다. 

나의 사랑, 나의 화상, 나의 달링, 나의 웬수, 즉 나의 서방님이여!


익살꾼.


Dreamer.
피터팬.


All photos by Yellow Du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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