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온 시간이 살아갈 시간에게 건네는 말
"어리석은 사람은 인연을 만나도 몰라보고, 보통 사람은 인연인 줄 알면서도 놓치고, 현명한 사람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을 살려낸다."
신희상의 시 <인연을 살릴 줄 알아야 한다>의 한 구절이다. 나는 현명한 사람이 아니지만, 인연을 살리는 방법도 모르지만, 아무래도 운이 좋은 사람인 것 같다. 만났는데 이어나가고 있고, 스쳤는데 인연을 살려가고 있으니 말이다.
어제는 나도 기록 디자이너 2기 모임이 있었다. 기록 디자이너, 입문과 심화 각 8주씩 진행되는 글쓰기 수업이다. 2기는 작년 6월에 시작해 모든 과정이 끝이 났지만, 지금까지 비정기적으로 모임을 이어오고 있었다. 글쓰기 수업을 할 때나 내가 할 이야기가 있을까, 솔직히 내가 뭔가를 준비할 필요는 없다. 자신의 것으로 만나 서로의 것이 되는 시간, 안부를 묻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여행 아닌 여행을 즐기면 충분하다. 오후 햇살이 느릿하게 책상 위에서 그림자를 훔치는 동안, 뭉친 듯, 자유로운 듯, 세상의 가장 좋은 것을 만나고 있다는 느낌이 들곤 한다. 특히 어제는 어른들뿐만 아니라 아이들도 함께 다녀갔다. 친숙해진 어른들과는 달리 서먹하고 어색했을 턴데, 짧지 않은 시간을 기다려준 녀석들이 대견하다. 왜 자꾸만 할머니 마음이 되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이들에게 과자라도 하나 사 주지 못한 것이 헤어지고 나서 내내 아쉬웠다. 손을 흔들면서 집으로 돌아간 아이들, 얼굴의 절반을 가린 마스크를 벗고 다시 만나면 과자라도 하나 사줘야지, 혼자 다짐해보고 있다.
"함부로 인연을 맺지 말라"라고 당부한 법정 스님 말씀에도 나는 인연을 맺는 일을 계속해오고 있다. 말과 글로, 독서와 글쓰기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만나고, 옷깃을 스치는 시간을 만들어내고 있다. 누군가가 다가온다면 한 사람이 오는 게 아니라 한 사람의 인생이 온다고 했다. 나와 다르게 살아온, 다른 방식으로 여기까지 걸어온 사람들과의 만남에는 세상이 내보내는 신호가 숨어있고, 내가 만들어갈 무늬에 생명을 불어넣어 준다. 때론 외롭게, 때론 용감하게, 때론 담담하게 지내온 지나온 인생 사용법을 어떤 대가도 없이 내어놓는 시간이 귀하고 소중할 따름이다. 글쓰기 수업을 하면 좋을 것 같아서 시작했고, 무사하게 과정을 마친 것도 감사한데, 그 이후에도 인연을 이어나갈 수 있게 된 것이 그저 신기하고 감사하다.
인생 전체에서 얼마쯤 왔는지 모르겠다. 또 얼마쯤 남아있는지도 모르겠다. 글쓰기 수업, 누군가에겐 단순한 수업이겠지만, 나에겐 수업 그 이상이다. 인연이고, 인생이고, 여행이다. 수업에서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상의 좋은 것을 내게 가져다주는 스승이다. 바람이 있다면, 그들에게서 내가 영감을 얻고, 힘을 얻는 것처럼, 나도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 사람을 생각하면 힘이 나'라는 말로 오르막을 오르고, 평평한 길에서 호흡을 가다듬을 때 '덕분에 힘들지 않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나였으면 좋겠다. 내게 그러했듯, 그들에게도 좋은 인연으로 기억된다면 참 근사할 것 같다.
by 기록디자이너 윤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