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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가장 무서운 게 있다면,

by 윤슬작가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가장 무서운 게 있다면 무엇일까?'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아보겠다고 다짐한 순간부터 늘 품고 다니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글을 쓰는 것과 상관없이 길을 걷다가 떠오르기도 하지만,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차로 이동하거나 전혀 나 같아 보이지 않는 생각이나 행동이 발견될 때 불쑥 튀어나온다. 한동안은 '글빚'이라는 단어가 화두였다. 내가 잘 알아서, 혹은 장담할 수 있어서라기보다 내 눈에 자주 띄었고, 적어도 방향성만큼은 무해해 보인다는 이유로 문장을 엮어 글을 완성했었는데, 어느 순간 어깨에 빚만 잔뜩 짊어진 느낌이었다. 선량하다는 것과 무지하다는 것이 동의어가 될 수 없음에도, 가끔 애매하게 경계를 넘나들면서 글을 쓴 까닭일까, 부채감 같은 게 있었던 모양이다. 그 과정에서 만난 단어가 '글빚'이다.


마흔 중반에 들어서면서 나는 실로 오랫동안 붙들고 있었던 단어 하나를 내려놓았다.

'말빚'


어떻게 된 일인지 마음보다 말이 빨랐고, 생각보다도 빨랐다.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상황 판단보다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단정적인 표현을, 빠르게 쏟아내었다. 어릴 때 엄마가 농담처럼 '물에 빠져도 입만 동동 뜰' 거라는 예언했는데, 그 영향 때문이라고 억지를 부리고 싶어진다. 하여간 나는 말하기를 좋아했다. 그러다 보니 실수가 잦았다. 덕분에 더 말이 많아졌다. 실수를 바로잡기 위해서, 오해를 줄이기 위해서. 다시 똑같은 상황을 마주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말빚'이라는 단어를 체감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덕분에 합리적 의심을 하게 되었고, 말을 줄여나가면서 실수를 줄이고 있으니, 긍정적인 변화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글빚'이다.


왜냐하면 말을 줄여나가지만, 글은 전혀 줄어들 기미가 안 보이기 때문이다. 아니 조금 더 매달리고 달려드는 모습이다. 그렇다 보니 '말빚'과는 방향이 많이 다르다. 혁신이라고 할만한, 그러니까 줄이거나 늘이는 방식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글빚'은 과제가 되었다.


오늘도 나는 글을 쓴다. 그러니까 '글빚'을 생산하고 있는 중이다. 해결 방법을 찾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지만, 여전히 쉽지 않아 보인다. 그래도 꽤 오랜 시간 고민을 한 덕분인지, 몇 가지 변화가 생겨난 것은 사실이다. 내 눈이 아니라 상대의 눈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지니게 되었다거나 하늘의 뜬구름을 잡는 얘기가 아니라 눈앞에서 목격한 풍경을 그려내는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까 확률적으로 '빚'이 생겨날 가짓수를 줄이고 있는 셈이다.


또 한 가지. 적어도 내가 무엇을 쓰고 있는지, 어떤 말을 하려는지에 대한 인식도 어느 정도 명료해진 느낌이다. 혼자 '뭔가 이상한데...'라고 자판을 바라보며 독백하는 일이 줄어든 것을 보면 말이다. 완전히 새로워지거나 고민이 해결되지는 않고 있지만, 적어도 안목이라는 것이 생겨났고, 뒤로 걷는 기분은 들지 않는다. 만약 끊임없는 노력의 성과가 이런 것이라면, 그리고 끝내 닿게 된다면, 우선은 계속 걸어가 볼 생각이다. 지금처럼 돌다리를 두들기듯, 내 안을 들여다보면서 말이다.


FROM. 기록디자이너 윤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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