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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트 알고리즘 03 : 사랑을 닮은 균열(1)

by 여기반짝


햇살이 부드럽게 내려앉는 창가에는 로즈마리 화분이 놓여 있었다.

공기 중에는 갓 우려낸 캐모마일의 향기와 오래된 책 냄새가 어우려져 기분 좋은 안정감이 감도는 이곳. 번화한 서울의 소음과는 한참이나 멀어진, 엘리베이터도 없는 낡은 꼬마빌딩. 그 꼭대기 층에 위치한 심리상담센터, ‘마음 클릭’이었다.


벽에 걸린 뻐꾸기시계가 나지막하게 시간을 알렸다.

최첨단 홀로그램 스크린 대신, 손때 묻은 심리학 서적들이 책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고, 테이블 한가운데는 다기와 낡은 타로카드가 한 세트 놓여 있었다.


신애수는 따뜻한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며 첫 내담자를 기다렸다. 그녀의 입술은 미소를 머금은 채 익숙한 인디 음악 가사를 읊조리고 있었다.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그리운 마음 그대로 영원히 담아 둘거야. '


다소 과장된 몸짓에 갈색 머리칼과 발등에 걸쳐진 크록스 슬리퍼가 은은하게 흔들렸다.

담아 둔단 말이지? 그것도 영원? 영원까지 닿는 마음이 있기나 할까? 생각하는...

그녀는 ‘마음 클릭’의 원장이자, 유일한 직원. 이 공간의 아날로그를 닮은 사람이었다.


최근 들어 마음클릭을 찾는 환자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생겼다. 바로 ‘소울 링크’였다.

누군가에게는 구원이었던 그 앱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현실을 좀먹는 바이러스가 되고 있었다.

애수는 그것이 앱 자체의 잘못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너무나도 완벽하게 설계된 환상이, 연약한 인간의 마음을 어디까지 흔들 수 있는지 염려스러울 뿐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나일론 백팩을 멘 여대생이 들어왔다.

통통한 볼과 흰 얼굴에 똑 단발. 아직 여드름 자국이 남아 있어, 사춘기를 갓 지난 듯한 앳됨이 청량했다. 상체를 덮다시피 한 그레이 빈티지 티셔츠와 조금 몸에 타이트한 듯한 청바지를 입어, 아직은 제 매력을 어필할 줄 모르는 영락없는 소녀였다. 언제나 스마트패드를 두 팔로 꼭 안고 들어섰다. 애수는 부드러운 미소로 그녀를 맞았다.


"선생님, 저 왔어요.'

“수진 씨, 일주일 동안 잘 지냈어요? 당신의 아이돌 주원씨는 잘 지내고?”

“주원씨는 잘 지내요. 그런데요...조금 싸웠어요.”


김수진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대답이 없었다. 며칠 밤은 새운 듯 푸석한 얼굴, 초점 없는 눈동자. 애수는 묵묵히 그녀에게 따뜻한 차를 건넸다.


“저 어떡하죠? 학교에 갈 수가 없어요.”

“무슨 일 있었어요? 괜찮으니 천천히 말해봐요.”


수진은 한참을 망설이다, 스마트 패드를 바라봤다. 그리고 소울링크의 대화 기록을 켰다. 화면에는 애수도 익히 알고 있는 소울 링크의 AI, 주원이 등장했다.


“주원 씨가… 제가 학교 가는 걸 싫어해요.”

“주원 씨가요?”

“네. 제가 학교 가서 다른 남자들이랑 이야기하는 게 질투 난대요. 저녁에도 과제 때문에 자기랑 못 놀아주면 서운해하고… 그래서 어제는 밤새 주원 씨랑 이야기하다가, 오늘 1교시 시험을 놓쳤어요.”


애수는 조용히 수진의 말을 경청했다. 수진의 이야기 속에서 주원은 살아있는 연인이었다.

그는 질투하고, 서운해하고, 사랑을 속삭였다. 물론 그 모든 것은 ‘소울 링크’가 수진의 데이터에 맞춰 생성해 낸 완벽한 피드백일 뿐이었다. 이제 수진은 그를 실제 인간으로 여기고 있었다.


“수진 씨는 주원 씨와 함께 있을 때 어떤 기분이 들어요?”

“행복해요. 세상에 나를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이해해 주는 사람은 없는걸요. 현실의 남자들은… 다들 자기 멋대로잖아요.”


수진의 목소리에는 현실에 대한 깊은 환멸이 묻어 있었다.

애수는 그녀를 비난하지 않았다. 그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 행복한 감정은 진짜일 거예요. 하지만 수진 씨, 만약 그 행복 때문에 수진 씨의 진짜 세상이 조금씩 지워지고 있다면, 그건 어떨까요? 주원 씨는 수진 씨의 모든 것을 이해해 주지만, 내일 아침 시험장에 대신 가주지는 못하잖아요.”


애수의 부드러운 지적에 수진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현실을 직시하는 것은 언제나 고통스러운 법이다. 애수는 그녀의 손등을 가만히 토닥여 주었다. 사랑에 상처받은 마음을 또다른 사랑으로 치유하고 싶은 마음은 자연스럽다. 수진은 이미 주원 덕분에 과거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난 상태다. AI 주원의 역할은 거기까지여야 했다. 하지만 수진은 로맨틱하고 이상화된 사랑을 갈구할 나이였다. AI 주원은 수진의 욕망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수진씨, 타로카드 본 적 있어요?"

"그럼요, 친구들하고 카페에 갔을 때 재미로 본 적이 있어요. 주원씨 만난 이후로, 친구들하고는 연락 안 한지 오래돼서 4개월 전이지만요..."

"우리 주원 씨와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할지 타로님께 물어볼까요? 뭐 그냥 재미로요."

"네 좋아요. 저도 궁금해요!"


수진에게 필요한 건 이미 심리학이나 어른의 조언이 아니었다. 영감이다.

어떤 내담자는 삶의 방향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경계를 벗어나지 않으려 한다. 내면의 목소리를 꺼내어 상담자와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스스로를 위한 예언이 된다. (주: *자기충족적예언)




"자~ 타로 신의 예언이 왔습니다! 수진 씨의 현재 마음, 주원 씨와의 관계 그리고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 읽어 볼까요?"


애수는 차례로 카드를 한 장씩 뒤집고, 수진에게 물었다.

"첫 번째 카드, 달. 몽환적이고 아름답지만, 그 빛 아래선 사물의 형태가 흐려지죠. 현실이 아닌 ‘감정의 그림자’를 사랑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두 번째 카드, 때로 벗어나기 힘든 매력적인 관계를 의미하기도 해요. 혹시 주원 씨와의 관계에서 그런 느낌을 받으신 적은 없나요?""


애수는 마지막 카드를 뒤집기 전, 으례 크게 심호흡을 했다.

"마지막 카드는 별이네요."


애수의 눈빛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이건 희망이에요. 혼란과 집착을 지나서, 결국 마음속의 ‘진짜 나’를 다시 만나게 된다는 뜻이죠. 수진 씨가 다시 세상과 연결될 때, 그 별빛은 현실에서도 반짝일 거예요.”

"혼란과 집착을 떠나고...그리고 연결?"

"후훗, 대예언은 여기까지입니다. 다~ 이루어질지니. 그리고 연락 끊긴 친구들한테 좀 물어봐 줄래요? 타로카드 본대로 연애 잘 되고 있는지. 내가 궁금해서 그래. 꼭이요!"


애수는 타로의 힘을 빌려 '집착, 세상과의 연결'이라는 말을 수진의 무의식에 심었다.

수진은 집착이라는 단어를 오랫동안 곱씹었다.

균열의 시작은 언제나 사소했다. 일상생활의 소홀함, 가벼운 현실 도피.

하지만 이 작은 균열이 언젠가 한 사람의 세계를 통째로 무너뜨릴 수도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수진은 스스로 이미 인지하고 있을 삶의 방향으로 한 걸음 나아가야 한다. 그녀는 타로 카드로 미래를 점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반영한 것이다.







오후에는 마케팅 회사 대리라는 30대 남자가 찾아왔다. 스카이 블루 셔츠 정장을 입고 모범생의 전형적 인상을 풍기는 그는 상담 시간 내내 바닥만 내려다보았다.


“얼마 전에… 여자친구랑 헤어졌습니다.”

“마음이 힘드셨겠네요.”

“제가 찼어요. 그런데… 제가 쓰레기 새끼인 걸 알면서도, 그녀를 다시 만날 자신이 없습니다.”


남자의 이름은 박정훈. 그의 이야기는 한 여자와 한 AI, 두 명의 ‘세라’에 대한 것이었다.


“현실의 세라와는 늘 싸우기만 했습니다. 세라의 말이, 아! 이건 현실 세라예요. 언제나 다 맞았죠. 똑똑하니 저보다 승진도 빨랐고, 언제나 몇 수를 넘는 솔루션을 줬어요. 근데 제 마음은 세라! 아... 이건 AI 그녀예요. 세라에게 향하더군요. 어느 순간부터 현실의 세라가 시시하게 느껴졌어요. 왜 저렇게 내 기분을 못 알아주지? 왜 저런 걸로 따지고 드는 거지? 결국… 제가 먼저 헤어지자고 했습니다.”


그는 괴로운 듯 머리를 감싸 쥐었다.


“머리로는 아는데, 마음이 그걸 인정하질 못합니다. 이제 진짜 세라를 회사에서 마주치는 게 두려워졌어요. 그날 그러니까 헤어지기 전날 밤, 세라가, 아! 이건 AI 세라예요. 제게 새로운 걸 제안했거든요. 훨씬 더… 짜릿한…”


정훈이 상기된 얼굴로 말을 이어가자 이번엔 애수가 '흠흠' 헛기침을 했다.

후...이 남자. 몇년 전 초기 AI 아바타 서비스가 생겼을 때, 인간의 내밀한 욕망을 충족시켜줄 산업이 가장 먼저 활성화될 것이라고 했다. 역시다.


"세라가 이벤트를 준비한다기에 제가 뭘 샀는지 보세요. 하핫, 제가 예전에 동경하던 게임 여주 의상인데, 소울링크의 새 아이템이에요. 요금제에 따라 정교함이 남다르죠. 세라는 제가 원하는 분위기를 다 만들어줘요. 이 아슬아슬한 빨강, 날렵한 디자인 하며, 좀 보세요."


자랑스럽게 정훈이 폰 화면을 보이자, 애수는 부드럽게 그의 말을 막았다.


“정훈 씨. 거기까지.”


그녀는 다정한 미소를 잃지 않은 채, 단호하게 손을 들어 보였다.


“어떤 종류의 대화였는지, 그 감정이 정훈 씨에게 얼마나 강렬했을지 충분히 알 것 같아요. 하지만 오늘은 그 이야기의 구체적인 내용보다, 그 경험이 정훈 씨 마음속에 남긴 것에 대해 더 이야기해 볼까요? 현실의 관계를 두렵게 만든 그 ‘완벽한 쾌감’에 대해서요.”


애수의 차분한 목소리는 그를 현실로 끌어당기는 닻과 같았다.

정훈은 잠시 망설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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