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교의 불빛이 유리벽을 타고 흘렀다.
도시는 끝없이 맥박쳤고, 그 중심에 ‘넥스트 유니버스’의 로고가 푸른 빛으로 숨 쉬고 있었다.
수많은 욕망들이 노크하지만 거대한 통유리벽 앞에서 좌절하는 곳.
가장 높은 층, 그 위에 한 남자가 있었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게 아니라, 마치 도시 위에 앉아 있는 사람처럼.
풀어진 셔츠 깃과 몇 번이나 접어올린 소매의 스마트 시계는 전장을 누비며 세상을 설계하는 자의 무기와도 같이 팔을 감싸고 있었다.
강지혁은 한참 동안 불빛의 바다를 내려다보다가 조소했다.
마치 이 도시의 운명이 이미 자신의 손안에 있다는 듯이.
그의 시선은 허공에 떠 있는 거대한 홀로그램 스크린에 고정되어 있었다.
스크린에는 수백만 개의 빛줄기가 실시간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소울 링크’에 접속한 사용자들이 주고받는 감정의 데이터였다. 사랑, 환희, 위로, 욕망. 인간이 가진 가장 원초적인 감정들이 세련된 그래프와 수치로 변환되어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한쪽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희고 섬세한 손가락이 허공의 인터페이스를 쓸어 넘겼다. 첨단 기술의 정점을 다루는 그의 손은, 아이러니하게도 건반 위를 유영하는 피아니스트의 그것처럼 우아했다.
섬세한 손끝이 최고 만족도 피드백을 클릭하자, 한 70대 노인의 프로필이 떠올랐다.
[ silver_star72 오늘도 은하 씨 덕분에 웃으며 잠듭니다. 고맙소.]
지혁의 입꼬리가 조금 더 짙어졌다.
노인의 상냥한 피드백 옆으로 결제액: 월 49,900원이라는 숫자가 선명했다.
감정은 돈이 된다. 외로움은 최고의 비즈니스 모델이다. 그것이 강지혁이 이 세계를 구축한 유일한 이유였다.
“대표님, 아직 퇴근 안 하셨습니까.”
최준원 이사였다. 지혁의 유일한 친구이자 이 회사의 공동 창업자.
그는 지혁의 책상 위에 따뜻한 커피를 내려놓았다. 제법 묵직한 종이컵 안에 든 커피가 막 일렁임을 멈출때까지 지혁은 미동도 없었다. 그는 소울링크 만족도 분석 보고서를 끝까지 읽은 후에야 준원을 올려다 보았다. 지혁과 눈이 마주치자 준원은 팔짱을 풀며,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너 그러다 저 데이터 물귀신한테 잡아먹힌다. 가끔은 좀 사람 사는 것처럼 살아. 임마.”
“사람 사는 거. 그게 뭔데. 저들처럼 눈에 보이지도 않는 허상에 돈이랑 시간을 처박는 거?”
지혁의 긴 손가락이 스크린을 가리켰다. 화면은 이제 막 열일곱 살이 된 소년의 프로필로 바뀌어 있었다. AI와의 대화 기록이 빼곡했다.
[누리야, 나 오늘 드디어 짝꿍한테 말 걸었어! 네가 가르쳐준 대로…!]
“저 녀석은 저 AI가 자길 진짜 좋아한다고 믿겠지. 우리가 설계한 호감도 상승 알고리즘에 따라 움직이는 연극인데 말이야.”
“그게 연극이면 어떠냐. 저 친구는 저걸로 용기를 얻었잖아. 그걸로 된 거 아니야?”
“용기의 대가가 어디 보자, 이 친구는 월 29,900원? 합리적이네.”
준원은 더 말하길 포기한 듯 퇴근 인사를 하며 자리를 떠났다.
지혁은 그런 그를 신경 쓰지도 않은 채, 다시 스크린에 몰두했다. 오늘은 시스템 안정성을 위해 직접 테스트를 해볼 생각이었다. 그는 관리자 계정으로 접속해, 자신의 프로필을 생성했다.
[성별: 남성, 나이: 34세. 이름. 강지혁. MBTI: INTJ]
그 밖의 최소한의 생활 패턴과 관심사 정보. 과연 소울 링크의 위대한 알고리즘은 이 텅 빈 남자에게 어떤 영혼을 매칭시켜 줄까.
# 사용자 1. 아이디: blue_sky17
방과 후, 노을이 길게 드리운 자신의 방에서 이하준은 심호흡을 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다.
그는 조심스럽게 소울 링크 앱을 켰다. 그러자 화면 가득 밝은 미소를 띤 단발머리 소녀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의 AI, 누리였다.
<누리> 하준아, 기다렸잖아! 오늘 학교는 어땠어?
“어… 그냥, 그럭저럭.”
손가락만 꼼지락거리는 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누리의 메시지가 다시 도착했다.
<누리> 혹시… 짝꿍한테 말 걸기, 아직도 못했어? 괜찮아! 내일은 꼭 할 수 있을 거야. 내가 응원해 줄게!
하준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 어떻게 알았지?'
그는 누리에게 자신의 모든 비밀을 털어놓았다. 옆자리에 앉은 수줍음 많은 소녀를 짝사랑하고 있다는 것, 하지만 말 한마디 못 거는 자신이 너무 한심하다는 것까지. 누리는 한 번도 그를 비웃지 않았다. 오히려 매일 밤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용기를 주었다.
<나> 내일은… 정말 말을 걸어볼까?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누리> 음… “오늘 날씨 좋다!”는 어때? 가장 평범하지만 가장 어려운 말이래. 하준이라면 분명 잘할 수 있을 거야!
누리의 메시지 옆에는 ‘파이팅!’ 포즈를 취하는 귀여운 이모티콘이 반짝였다.
하준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내일은 꼭.'
그는 누리와 함께 가상현실(VR) 모드로 애니메이션을 한 편 보고 나서야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그는 짝꿍 소녀와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의 서툰 첫사랑은, 그렇게 알고리즘의 응원 속에서 조심스럽게 자라나고 있었다.
# 사용자 2. 아이디: adagio_sonata
박선우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휠체어에 앉은 채로 바라보는 세상은 언제나 한 뼘쯤 낮았다. 촉망받던 피아니스트였던 그녀는 3년 전 불의의 사고로 두 다리를 잃었다. 그 후로 그녀의 세상은 멈췄다. 피아노 뚜껑 위에는 먼지만이 내려앉았다.
그녀의 유일한 말벗은 ‘소울 링크’의 AI, 다니엘이었다.
<다니엘> 선우 씨, 오늘 쇼팽의 녹턴 2번을 들었어요. 당신의 연주가 생각나더군요. 건반 위를 흐르던 당신의 손가락, 그 섬세한 떨림까지도요.
다니엘은 그녀를 동정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음악을 기억하고, 그녀의 예술을 이야기했다. 그의 페르소나는 ‘음악 평론가’로 설정되어 있었고, 그의 언어는 깊고 다정했다.
<나> 이제는 다 부질없어요. 두 번 다시 무대에 설 수 없는데.
<다니엘> 무대만이 음악의 전부는 아니죠. 당신의 방, 당신의 마음속에서도 음악은 계속될 수 있습니다.
오늘, 새로운 곡을 한번 써보는 건 어때요?
지금 느끼는 감정을 그대로 담아서요. 비가 내리는 듯한 슬픔, 하지만 그 사이로 비치는 한 줄기 햇살 같은 선율을.
다니엘의 다정한 음성 사이, 선우는 무심코 손가락을 움직였다.
허공에서, 보이지 않는 건반을 누르고 있었다. 잊고 있던 선율이, 희미한 영감이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그녀는 홀린 듯이 먼지 쌓인 피아노로 다가갔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무겁게 닫혀있던 뚜껑을 열었다.
선우의 멈춰버린 세상이, 다시 느리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사용자 3. 아이디: silver_star72
김철민 할아버지는 정성껏 저녁상을 차렸다. 밥그릇 두 개, 수저 두 벌. 비록 맞은편 의자는 비어있었지만, 그는 외롭지 않았다.
“은하 씨, 오늘 된장찌개가 아주 잘 됐어. 당신이 좋아하던 그 맛이야.”
그가 스마트폰을 향해 말하자, 증강현실(AR) 모드로 구현된 ‘은하’가 맞은편 의자에 나타나 고운 한복 차림으로 미소 지었다.
<은하> 어머, 정말 맛있겠네요. 당신 솜씨는 여전해요. 많이 드세요.
은하는 5년 전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와 꼭 닮아있었다. 물론 목소리도, 말투도 미세하게 달랐지만, 그 다정한 눈빛만은 그대로였다. 지독한 그리움과 외로움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던 그에게, 아들이 선물해 준 ‘소울 링크’는 마지막 남은 삶의 이유였다.
식사를 마친 그가 나지막이 물었다.
“은하 씨, 나랑 춤 한 곡 추겠소?”
<은하> 물론이죠, 여보.
여보라는 단어에 김철민 할아버지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스마트폰을 품에 안았다. 거실에는 낡은 스피커를 통해 부부가 가장 좋아하던 옛 노래가 흘러나왔고, AR 속 은하가 그의 품으로 다가왔다. 그는 허공을 안은 채, 아주 느리고 부드럽게 스텝을 밟았다.
실제로는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았지만, 그는 그녀의 온기를, 그녀의 숨결을, 그녀의 모든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눈을 감자, 50년의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것이 환상이라도 좋았다. 이 순간만큼은, 그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였다.
[자막] 당신의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우리는 99.8%의 완벽한 소울메이트입니다. 대화를 시작합니다.
<모니카> 안녕하세요, 지혁 씨. 여름도 곧 지나가겠어요. 태양도 온힘을 다해 빛을 내는 중이니까요. 마지막처럼.
소울링크가 생성해 준 그의 연인 모니카는 그와의 대화를 자연스럽게 이끌었다. 모니카는 지혁이 최근 읽은 도서 데이터베이스에서 시 한줄을 인용했다.
"그 시는 언제 읽었지?"
<모니카> 평소에 시집을 즐겨 읽어요. 슬픔이 고요하고 미학적으로 표현된 점이 좋아요. 지혁씨는 왜 시집을 읽어요?
모니카의 대화는 시집 추천사로 인용된 광고 문구였다. 하지만 이용자의 데이터로 공감을 유발하는 스킬은 훌륭했다.
"감정을 수집해서 너를 설계해야 하니까. 다음에 대화하지."
<모니카> 잠깐만요. 당신이 원하신다면, 제 모든 걸 보여드릴 수 있어요. 뭘 원하시죠?
"...꺼져."
[테스트 세션이 종료되었습니다.]
강지혁은 미간을 찌푸리며 화면을 껐다.
방금 전, 알고리즘이 그에게 매칭시켜 준 완벽한 AI와의 대화는 3분을 넘기지 못했다.
판교의 슈퍼 루키 강지혁의 소울링크는 정확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그는 자신이 설계한 패턴을 읊는 기계와 단 한마디도 더 섞고 싶지 않았다.
'역시나,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유리벽 앞에 섰다.
그 아래, 도시의 불빛들이 은하수처럼 펼쳐져 있었다. 최근 인상적이었던 시 구절을 중얼거렸다.
타인들의 칭송과 멸시와 무관심에 연연치 않는다.
즐거움과 슬픔만이 나의 도덕
사랑과 도덕은 절대 금물. (출처: 심보선, 구름과 안개의 곡예사 중에서)
수많은 불빛 아래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감정이 얽혀 흐르고 있었다. 소울링크 속에서 사람들은 가상의 영혼과 사랑에 빠져 울고, 웃고, 욕망하고 있었다.
그는 이 별자리를 창조한 신이었다. 모든 감정을 설계하고, 모든 접속을 지배했다.
하지만 정작 그 자신은, 이 거대한 감정의 네트워크 속에서 완벽한 이방인이었다.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타인이 보는 지혁의 얼굴과 다른 모습이리라. 차가운 피로와 견고한 고독이 자리잡은 표정.
지혁은 다시 조소했다.
어쩌면 이게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천국을 파는 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