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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신 Feb 01. 2022

태닝 크림은 있어도 톤업 크림은 없는데요.

12. 산책의 묘미



   엄마는 종종 “우리 딸은 거리 귀신이 씌었나 봐.”라고 했다. 늘 나를 '온실 속의 화초'처럼 키우셨는데 세상 밖이 너무 궁금했던 나는 화초보다는 풀꽃이 어울렸다. 그래서 여행을 가든 산책을 가든 무엇을 배우러 가든 사람을 만나든 끊임없이 거리를 걸으며 외부 세계를 탐구했다. 물론 왠지 모를 의무감에 다이어트와 체력 증진을 목적으로 요가도 하고, 필라테스도 했다. 하지만 이런 운동다운 운동보다는 주변 환경을 오감으로 느끼며 걸을 때 뿌듯함과 만족감이 더 컸다.



  



  그래서 몰타에 와서는 걷고 또 걸었다. 건강의 척도가 되는 ‘만보 걷기’는 ‘삼시 세 끼 먹는 것’보다 더 달성하기 쉬웠다. 그도 그럴 것이 아침 산책으로 시작된 나의 거리 탐색은 식사 후 산책, 노을 산책으로 이어졌고 어느새 습관이 되었다. ‘바다를 따라 이어진 인도’와 ‘롱 패딩이 어울리지 않는 겨울 날씨’ 덕분에 몰타에서는 사계절 내내 걷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아침 산책의 끝이 단골 카페나 할아버지네 꽃집이었다면 오후 산책의 끝은 동네 중앙에 위치한 식료품점이었다. 백화점 지하 식품점처럼 생긴 이곳에는 없는 게 없었다. 나는 주로 아침에 먹을 그릭 요거트와 과일, 쌀 대신 먹었던 쿠스쿠스와 파스타를 샀고, 평소보다 많이 걸었을 때는 보상처럼 초콜릿 아이스크림도 장바구니에 담았다.




  


  산책을 하다 보면 다양한 사람들과 약속한 것처럼 만나게 된다. 한 번은 ‘걸어서 세계 속으로’ 몰타 편에 나와서 아리랑을 불러주셨던 할아버지를 우연히 만났다. 할아버지에게 유튜브 속 본인을 보여드렸더니 “나, 한국 가면 다들 알아보니?”라며 유쾌하게 반응하셨다. 한 여름날에 다시 만났을 때는 나의 휴대용 선풍기 바람을 쐬며 “최고의 발명품이구나!” 찬사를 보내셨다. 또 한 번은 이런 적도 있었다. 옐루(한국인 동생의 애칭)와 동네 산책을 하다가 영국풍의 카페 앞에서 인테리어가 예쁘다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는데 때마침 케이크를 정리하러 나온 아르바이트생을 보고 깜짝 놀랐다. “세상에나, 차은우를 똑 닮았잖아?” 그날, 그 시간대에 그 골목으로의 산책을 선택한 우리를 칭찬하며 종종 그곳에서 영어 스터디를 하였다. 그전까지 사장님들이 아르바이트생의 외모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나의 신념이 흔들렸던 사건이었다.


  한 날은 학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걸어가는데 20살이 갓 넘은 듯 보이는 백인 남자애가 “히사시부리(오랜만이야.)”라고 인사를 건네는 게 아닌가. 아는 일본 사람이랑 착각을 한 건지 신종 인종차별의 방법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지만, “나는 일본인이 아니야.”라고 반응해 주었다. 그러자 남자애는 “스미마셍(미안해.)”이라고 대답을 하며 지나갔다. 며칠 뒤에 한 화장품 가게에서 홍보를 하고 있는 그 남자애랑 다시 마주쳤다. 분명 일본인이 아니라고 했었는데 나를 보자마자 또다시 일본어로 말을 건넸다. 속이 상한 나는 큰 소리로 “나는 한국인이야!”라고 외치며 영어로 사과를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웬걸? 예상 밖의 언어가 들렸다. 남자애가 한국어로 “미안해, 누나, 예뻐요.”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어떤 한국인이 가르쳐줬는지는 모르겠지만, ‘홍보용’으로 안성맞춤인 단어를 잘 가르쳐줬구나 싶었다.

 


  


  화장품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끊임없는 산책의 부작용이 딱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피부가 탄다는 점이었다. 원래 나는 피부가 하얀 편이라 여름철마다 피부가 탄다기보다는 빨갛게 익어버렸다. 하지만 몰타의 강한 햇빛에는 피부가 검게 탔다. 얼굴은 모자로 가렸지만, 팔과 손의 피부는 점점 까매졌다. 흰 피부를 선호하는 나는 톤업 크림을 사기 위해 화장품 가게를 누볐다. 하지만 어딜 가나 돌아오는 대답은 ‘태닝 크림은 있다’는 말이었다. 유럽의 브랜드에서 나오는 톤업 선 크림은 정작 유럽인 몰타에서는 구할 수가 없었다.


  나는 결국 한국에서도 주문해본 적 없는 아마존 사이트에 들어가 한국산 톤업 크림을 주문했다. 상품 가격만큼의 배송비에 한 번, 생각보다 너무 빠르게 도착해서 또 한 번 놀랐다. 어릴 때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초등학생 때 야외 활동을 너무 많이 해서 그런지 피부가 까무잡잡했다. 중학생이 되고 외모에 관심이 많아지자 하얀 피부가 갖고 싶어졌다. 그래서 피부가 맑고 깨끗해진다는 TV광고 속 화장품을 구매했고 로션처럼 바르고 다녔다. 그 화장품 덕분인지 피부 갈이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다시 어릴 때와 같이 하얀 피부를 가지게 되었다. 그때부터 피부톤에 대한 일종의 집착이 생겼나 보다.


  해외살이를 하기 위해 캐리어 두 개에 1년 간 살림살이를 다 챙겨 오면서 미니멀리스트로 살아보겠다 다짐을 했는데 톤업 크림 하나도 포기 못하는 사람이었다니 헛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장소와 환경이 변해서 거기에 적응을 하는 모습도, 원래의 나를 유지하는 모습도 모두 ‘나’이다. 산책을 하며 단단해진 것은 두 다리 근육뿐이 아니었다. 몰랐던 나의 발견을 통해 마음 근육도 하루하루 단단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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