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선입견에 대하여
외국에만 나가면 현지인이 말을 많이 걸어온다. 뉴욕에 갔을 때는 현대미술관 이집트관에서 부딪힐 뻔했다가 다른 층에서 만나 한참을 미술관에 앉아서 대화를 한 현지인이 있었고, 혼자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 갔을 때는 현지인이 한국어로 말을 걸어온 적도 있었다. 처음에는 호객행위를 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한국에서 1년간 살았던 사람이었다. 교육 쪽에서 일한다는 두리뭉슬한 나의 대답에 “선생님이시구나!”라며 찰떡같이 알아듣던 놀라운 사람이었다.
물론 좋은 기억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어릴 때라 모르고 지나쳤는데 후에 그것이 ‘캣 콜링’이라는 것을 알았던 적도 있고, 특히 파리에서는 집시나 노숙자들이 부담스럽게 때로는 위협적이게 말을 걸기도 했다. 몰타는 치안이 좋은 편이라 그런 걱정은 없었지만, 한 번은 학원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한 남자가 뒤에서 자꾸 나를 부르는 것이었다. 헤드폰을 쓰고 있길래 처음에는 내가 착각을 했나 싶었는데 점점 거리를 좁혀오더니 자꾸 말을 걸며 플러팅을 하는 것이었다. 대낮이고 시내 한복판이라서 무섭지는 않았지만, 불쾌했다. 그래서 맥도널드 앞에 선 채로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고 ‘no’만 반복해서 외쳤다. 계속된 나의 무반응에 그 남자는 결국 돌아갔지만 괜히 무서워진 나는 집으로 곧장 가지 않고 한참을 슈퍼마켓에서 시간을 때우다 귀가했다.
한 번은 우연히 알게 된 남자와 차를 마신 적이 있다. 그는 모로코인 어머니와 독일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고 이러한 영향 덕분에 아랍어,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영어까지 5개 국어를 한다고 했다. 처음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살아온 삶의 과정과 앞으로의 인생 계획을 이야기하는 모습이 멋져 보였다. 그런데 한 가지, 말을 하는 도중에 무의식인지 의식적인 건지 모르겠지만, ‘아시아인은 무조건 착하다’라는 뉘앙스를 풍기는 말을 많이 했다. 얼핏 들으면 칭찬 같겠지만, 내 귀에는 일종의 ‘가스 라이팅’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아시아 여자’에 대한 호기심은 인연을 끊기에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또 한 번은 옐루(한국인 동생 애칭)와 단골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데 캐나다인이라는 한 친구가 다가와서 너희들 너무 멋지다고 한국인이 맞냐고 물어왔다. 자기에게는 아시아인 친구들이 몇몇 있어서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을 구별할 수 있다고 했다. 디지털 노매드처럼 보이는 그는 작은 스타트업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고 캐나다인이지만, 부모님이 이곳 몰타에 살고 있어서 오게 되었다고 했다. 카페에서 우연히 만났기에 다음 만남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다시 만났을 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이 친구 또한 아시아인 특히 아시아 여자에 대한 선입견을 단단히 가지고 있었다. 나와 동생은 그건 사람마다 다르다며 반박했지만, 그들의 고정관념은 꽤 깊은 듯했다. ‘부모님 말도 잘 안 듣는데, 내가 왜 너네 말을 잘 듣겠니?’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우리는 그렇게 말 잘 듣는 사람들은 아니다.”라는 말로 대신했다.
그 외에도 생각을 곱씹으면 비슷한 일이 종종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사람들을 ‘옐로 피버’라고 칭하는 것 같던데 뭐가 됐든 ‘선입견’을 무조건 사실로 믿으며 다양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틀에 가둬놓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서양인 친구들도 다 주장이 강한 것은 아니다. 누구보다 소극적인 친구도 있고, 한국인인 나보다 정이 더 깊은 친구도 있었다. 나 또한 의식하지 못한 채, 선입견이나 성급한 판단을 했을지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서 빨리 인종과 국적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를 보는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시대가 얼른 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