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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디이 Nov 08. 2023

아멜리, 그녀만의 것이 아니었던 인생

상류층을 줄 세우기 한 초상화계 슈퍼스타, 존 싱어 사전트 (2)

팜므파탈, 파리 인플루언서, 예술가들의 뮤즈- 사전트의 인생을 바꾼 마담 X의 모델인 아멜리. 프랑스 부자와의 결혼으로 경제적 안정을 얻었지만, 그녀는 왜 다시 파리로 향했을까요? 심리학적으로 보면 그 답이 선명해집니다.


이전 글에서 이어집니다.

https://brunch.co.kr/@nerdie109th/53


사전트가 간절히 원했던 파리의 팜므파탈 아멜리 버지니는 유부녀였습니다.


    결혼 전, 아멜리는 순결 (Virgin)하고 조용한 자연미인의 이미지를 유지했어. 유럽 상류층이 결혼 상대자로 원하는 여성상으로 본인을 보이려 애썼지. 하지만 결혼 후에는 마담 피에르 코트로라는 이름과 함께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어. 파리 사교계에서 주목받기 위해서 아주 전략적이고 계산된 화려함으로 사치스럽게 치장하기 시작했어. 원래도 하얗던 그녀가 딱 죽지 않을 정도의 비소를 섭취하여 회빛의 극도로 흰 피부를 유지했다는 소문도 돌았을 정도야. 파리 사람들은 아멜리가 아름다움을 관리하는 인위적인 방식에 대해서 떠들어대기 시작했어. 극도의 미를 추구하면서도 자연스러움을 강조하는 아이러니한 파리 사회였으니까. 어쩐지 우리의 현대 사회와 별로 다른 거 같지는 않아. 도대체 프랑스에서의 결혼이 그녀의 심리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던 걸까?


Gustave-Claude-Etienne Courtois' Madame Gautreau (1891) in Musée d’Orsay, Paris




프랑스판 사랑과 전쟁의 주인공, 아멜리가 단지 소문의 희생양만은 아니었습니다.


결혼을 통한 자유 아닌 방종


    만 19세의 아멜리는 본인보다 2배로 나이가 많고 돈도 아주 많은 프랑스 은행가 페드로 고트로 (Pedro Gautreau)와 결혼하여 프랑스에서의 신분을 높일 수 있었어. 페드로 고트로는 프랑스에서 국가로부터 인정받은 Legion of Honor, 프랑스군의 지휘관이기도 했지. 무엇보다 그는 브르타뉴 (Brittany) 지방의 가장 강력한 가문 출신인 어머니 (Louise La Chambre Gautreau)를 두었어. 남편과의 결혼으로, 아멜리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되고 당시 사회적인 풍습으로는 일을 해서도 안 되는 사회적 위치를 가지게 된 거야.


아멜리는 결혼 후 아이도 낳았어. 그 대가인 마냥, 남편으로부터 당시 4만 프랑에 달하는 돈까지 받았지. 그녀의 용돈이 한 달 1,000프랑에서 3,200프랑 (약 450만 원)으로 올랐으니, 남부러울 게 없었을 거야. 그렇게 정착하여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았다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외적인 걸 중시하며 살아온 아멜리가 결혼을 온전하게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거야. 남편 페드로는 외적으론 호감가지 않는 어두운 인상에 아주 키 작은 남성이었다고 전해져. 애초에 정략결혼이었으니 그녀에게 남편은 성공을 위한 수단이었겠지.


우리는 프랑스 상류층 부인들에게 '결혼을 통한 자유'는 어떤 의미인가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멜리는 결혼을 하면 남편의 신분 아래 보호받는다는 걸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어. 프랑스의 상류층 부인들은 남편의 이름 아래 사실상 자신들이 원하는 것은 뭐든지 할 수 있는 자리에 있었대. 심지어 불륜조차도 조용한 취미와 같이 용인되었다는 거야. 그들에겐 이런 것도 하나의 유희였던 거지. 분명한 건 아멜리가 결혼을 통한 자유라는 초기 목적을 달성한 이후 성향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거야.



사교계를 향한 아멜리의 집착은 그녀의 어떤 심리학적 성향 때문이었을까요?


과도한 치장과 일탈에 감춰진 심리적 공허함


    아멜리는 결혼과 출산 이후 예측할 수 없는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어. 더 본격적으로 파리에서 주목받고 사교계 유명인사가 되길 원했어. 가족과 아이가 있는 브르타뉴를 혼자 떠났고, 다시 파리로 돌아갔지. 당시 프랑스 상류층 여성들은 결혼하면 남편 가문의 안주인이 되어 각종 행사와 집안일을 감독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어. 당시 가문의 평판을 관리하고 보이는 것이 그들의 주요 소임이었지. 아멜리가 갑자기 파리로 떠나버린 건, 그 시대라면 합리적으로 받아들여지긴 어려운 일탈 행동이야.


Mademoiselle Amélie Avegno, © culturacolectiva.com

결혼 후, 사람들의 이목을 끈 것은 무엇보다도 아멜리의 전략적이고 유혹적인 패션이었대. 프랑스의 파리의 오후 4-5시는 당시 남성들이 정부의 집에 들러 밀회를 가지는 시간으로 인식되고 있었어. 아멜리아는 바로 그 정부들의 유혹적인 스타일을 따라 했대. 남성 후원자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싶어서였겠지. 하지만 아멜리는 이미 결혼한 상태였는데 왜? 아무리 인기를 얻고 싶어도 상식적으론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야.


이렇게 타인에 대한 인정과 애정을 극도로 바라던 아멜리의 욕구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이상 심리학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그녀의 변덕스러운 파리행과 만인의 사랑을 원하는 듯한 행동 패턴을 이해해 볼 수 있어. 아멜리는 어쩌면 인정과 애정 욕구가 강한 경계선 인격장애적 성향이 강했을지도 몰라. 물론, 병적 진단을 받을 정도는 아니었을 순 있지만, 경계선 인격장애의 스펙트럼상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어. 부자연스러울 정도의 과도한 치장은 경계선 인격장애의 공허함과 불안 표출 방식이기도 해. 인간관계에 대한 본인의 외로움을 외모를 꾸밈으로서 사람들을 유혹해 상쇄하려는 경향이 있거든.


경계선 인격장애가 사람의 애정을 갈구하는 방식은 밑 빠진 독에 관심을 들이붓는 것과 같아. 아무도 그 사람을 채워줄 수 없을 거야. 때문에 경계선 인격장애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대인관계와 연인관계에서 힘듦을 겪는 경우가 많아. 항상 인정과 사랑을 과도하게 요구하고 충동적으로 환경을 바꿨던 그녀의 성향이 경계선 인격장애 성향과 겹쳐 보이는 이유야. 혹시 그녀의 성장배경에 어떤 가정사라도 있었던 걸까?




비뚤어진 맹모삼천지교

 


    아멜리에게는 당시 세상의 풍파를 일찍부터 경험한 어머니 버지니가 있었어. 어머니 버지니의 목표는 당시 어마어마한 유럽 부르주아들이 모이던 파리 사교계에서 아멜리가 성공적으로 데뷔하는 것이었어. 목적은 딸 아멜리의 취집. 아멜리라는 이름도 그녀의 풀네임 Virginie Amélie Avegno Gautreau에서 프랑스식으로 중간만 따온 거야.


아멜리는 8살부터는 아예 파리에서 교육받으며 자라게 돼. 딸이 한몫 단단히 잡고 결혼하길 바랐던 어머니 버지니가 딸을 말 많은 품평회에 내놓은 셈이지. 어머니 버지니가 어린 아멜리를 데리고 미국과 파리를 오갔던 환경도 아멜리가 정체성을 확립하고 안정적인 성격을 형성하는 데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을 거 같아.

 

아멜리의 어머니가 부를 축적한 과정은 바로 결혼을 통해서였습니다.  

아멜리가 어린아이였을 때, 42세의 엄마 마리 버지니 (Marie Verginie)는 이미 미국 루이지애나의 플런지 (Parlange) 지역 일대를 스스로 관리하는 가장 유명한 지주이자 백만장자였어. 그녀의 토지 가치는 당시 돈으로 300,000달러, 개인 재산 가치가 50,000달러로 현재 가치로는 수천만 달러에 이를 정도야. 하지만, 어머니 버지니는 본인의 사업 수완이 아닌 기회주의적 결혼관을 아멜리에게 물려주었어.


미모도, 남성편력도 사실 집안 내력?

 

어머니 버지니는 어찌 보면 결혼 수완이 뛰어난 사람이었어. 그녀의 첫 결혼은 17세였던 본인의 법정 보호자였던 47세 아저씨와의 만남으로 석연치 않게 시작되었어. 20살에는 첫 남편을 여의었지. 첫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세 명의 자녀를 데리고 부자와 재혼을 하면서 그녀의 재능은 꽃피우기 시작해. 남편의 재산을 본인이 직접 관리하기 시작하며 부를 축적했어.


결혼을 통해 삶의 수준을 바꾼 본인의 경험과 신념에 따라 아이들 또한 부유하고 적합한 결혼 상대자를 찾길 바랐어. 아멜리의 배다른 형제들은-한 명의 딸을 제외하면, 어머니 버지니의 기준에는 미치지 못했어. 방탕한 아들은 지역에서 유명한 망나니 (spoiled child)라서 딸을 둔 다른 부모들이 꺼리는 대상이었고, 딸은 어렸을 때부터 우울증과 같은 정신질환을 할아버지에게 물려받아 가족들이 쉬쉬하는 대상이었지.


파리에서의 어린 아멜리

 반면, 재혼한 남편과의 사이에서 얻었던 네 번째 아이인 아멜리의 유전자는 모두를 만족시켰어. 새하얀 피부와 로마인스러운 고전적인 코와 남편 가족들로부터 우아한 외모를 물려받았기 때문이야. 그렇기에 그녀의 어머니는 딸 아멜리의 사교계 생활에 더욱더 집착하게 되었을 거야. 결혼을 한 이후에도 마치 에이전시처럼 아멜리를 관리했어.




John Singer Sargent, early 1880s from Private Collection


나르시시스트와 경계선 인격장애 성향의 만남이었을까요?


사전트, 지독한 예술가 혹은 나르시시스트


    사전트는 아멜리 외에도 수많은 당대 여성 디바 (Diva)들을 모델로 섭외하고 사교적으로 지냈어. 그런데도 그가 죽을 때까지 그 어떤 여성과도 결혼하지 않았고 그들과 로맨틱한 관계를 맺지 않았어. 2000년대에 들어서서 사전트의 성적 취향과 작품과의 관계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며 밝혀진 사실을 보면, 그는 분명 강인하고 여성적인 아름다움에 이끌린 것으로 보여. 하지만, 그와 모델들과의 관계를 탐구해보면 그의 로맨틱 라이프를 단순히 정의내리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


사전트는 뛰어난 미모의 상류층 여성, 창녀, 사회적 참정권 운동가 등 어떤 방식으로든 사람들을 긴장시킬 수 있는 엄청난 매력을 가진 여성들은 언제나 그의 모델이었지. 그러나, 그건 오로지 직업적 찬미였던 것 같아. 어쩌면 그는 여성성과 담대함, 그 아름다움 자체를 객체화하고 우러러보며 표현하였지만, 본인 예술의 대상과는 마음을 나눌 수 없었던 거야. 인간적인 관심이 아니었으며, 디바로서의 여성 인사들을 철저히 본인의 작품에 이용한 것이지.


반면, 사전트는 당시 유럽에서 남성들 사이 공식적인 활동 방식이었던 스포츠, 누드화 그리기, 사교모임 등의 형태로 주로 남성들과 무언의 친교를 깊게 나누었다고 해. 대표적인 예가 사전트의 모델이었던 벨러로쉐 (Belloroche)와의 우정 이상의 관계였어. 벨러로쉐에겐 로맨틱한 감정으로 깊이 끌렸지만, 당시 사회상 그들 사이에는 동성이라는 뚜렷한 선이 있었지.


미술사학자들에 따르면, 사전트는 여성 안에서 남성성을, 남성 안에서 여성성을 보고 표현했습니다.


그가 단순히 게이였는지는 확실치 않아. 1882년도쯤부터 <마담 X>를 그리기 전까지 몇 년 간, 사전트는 벨러로쉐와 아멜리에게 가장 빠져있었고 그들을 계속해서 모델로 두고 그렸어. 흥미로운 점은 동일 시간선상에 두 사람을 만나고 그리면서, 그가 그린 아멜리의 그림에서 벨러로쉐가 보인다는 거야.

연구자들은 사전트가 아멜리를 그린 다른 그림 (오)을 분석하여, 그림 속 얼굴이 아멜리보다는 벨러로쉐의 굴곡 있는 입술과 남성스러운 윤곽에 가깝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같은 남성이었던 벨러로쉐와 결혼한 여성인 아멜리, 두 사람 모두에게 미적으로 미친 듯이 이끌렸기에 사전트는 이 둘을 계속해서 그렸지만 사랑하진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건 단지 시대적으로 두 사람 모두 우정 이상이 허락되지 않은 대상 이어서라기 보단, 사전트가 사실은 그 본인만을 제일 중시하는 나르시시스트적 성향이 있었기 때문 아닐까?


이런 사전트에게 그림을 완성한 뒤의 아멜리의 존재는 그 쓸모를 다한 뮤즈 그 이상이 아니었을 거야. 게다가 본인의 커리어와 성공, 미적 탐구를 최우선으로 두는 나르시시스트적 예술가였다면 더더욱 혹평을 받았던 <마담 X>의 모델 아멜리와의 관계에 관심이 없었겠지.


임상 심리학적으로 나르시시스트와 경계선 인격장애의 만남은 참으로 이어지기 쉬운 것이지만, 매우 파극적인 만남이라고 봐. 나르시시스트가 상대방에게 관심을 주는 방식이 매우 저돌적일 수 있어서 처음에는 경계선 인격장애성향이 원하는 극도의 감정을 충족시킬 수 있어. 그러나, 나르시시스트적 성향의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본인에게 집중된 이기성을 가져. 나르시시스트가 제공하던 초기의 관심에서 벗어나는 순간, 경계선 인격장애는 크나큰 충격을 받을 거야. 비극적이게도, 경계성 인격장애 성향의 사람은 그 누구도 채워줄 수 없었던 그 초기의 관심을 주었던 나르시시스트적 연인의 사랑을 더욱더 요구하게 되지. 하지만, 나르시시스트에게 상대방의 괴로움은 그다지 관심사가 아니야. 글자 그대로 모든 것이 내 중심으로 돌아가야 하거든. 동시에 권위주의적이기도 하지.


사전트도 미를 쫒는 예술가 이전에 욕망이 있는 인간이었을 텐데, 이 둘 이후에도 사전트의 삶에는 이상하리만치 명확한 로맨스가 보이지 않아. 그의 모델이거나 후원자였던 이는 많았고 사교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했지만 사전트는 누구와도 깊은 연을 맺지 않았어.


극도의 심미주의자였던 사전트는 본인이 원하던 미적 쾌감을 상대로부터 충족하고 나면, 흥미가 팍 식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더더욱 깊이 있고 본인 또한 희생할 수 있는 관계로까지는 감정이 발전되지 않았을 수도 있어.

 



아멜리, 만인의 연인에서 외면받는 정부로

        

    아멜리는 원래 파리의 예술가들이 섭외하고 싶어 하던 모델이었잖아. 하지만, <마담 X> 이후에 아멜리아를 모델로 한 그림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대.

Antonio de La Gandara's Portrait of Mme Pierre Gaudreau (1898)

 

아멜리의 어머니가 원했던 삶을 대신 살려고 노력하다가, 결국은 자신의 삶까지 무너뜨리는 유명세를 쫒게 되지 않았을까? 아멜리는 다시 한번 파리의 사교계에서 주목을 받아보고자 항상 잘나 보이는 남성들의 에스코트를 자처했어. 놀랍게도 남편과는 동행하지 않았다고 해. 아멜리가 풍족한 삶만을 바랐던 거라면 굳이 그러지 않았을 것 같아. 그녀는 스타와 같은 삶을 원했던 것 같아. 아멜리가 현대를 살고 있다면, 연예인이 되고 싶었을지도 모르지.


아멜리의 말년은 그리 평탄하지 않았어. 그녀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고 생활 수준도 떨어지게 되었지. <마담 X> 이후에 파리로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는 말도 있지만 사실은 아니야. 그녀는 몇 번이나 다시 파리의 사교 시즌에 참석하기 위해 돌아갔어. 아멜리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동생도 곧 세상을 떠났고 혼자 남겨졌던 그녀는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어. 유언조차도 명확하게 남은 것이 없는 채로. 이미 남편과 별거 상태였지만, 아멜리는 결국 그녀의 성에 따라 고향이 아닌 남편 가문의 브르타뉴 묘지에 묻혔어.

  



    10여 년 전 <카네이션, 릴리, 릴리, 로즈>에서 시작된 관심은 미국 생활에서 사전트의 그림을 찾아보는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애정하는 과거의 화가의 출신지에 살고 있다는 건 어쩌면 행운인 것 같아. 미국에서 뮤지엄을 갈 때마다 항상 사전트의 작품이 있나 찾아보는 습관이 생겼어. 약간 도장 깨기 하듯이, 뉴욕, 보스턴, 워싱턴 D.C., 그리고 L.A. 에서도 가는 곳마다 뮤지엄을 가고, 또 그 안에서 사전트의 그림을 감상하며 행복을 느껴.


사전트, 모데, 바그너와 같이 내가 애정하는 예술가들이 동시대를 살아가며 서로 알고 지냈다 생각하면 너무 신기하고 가슴이 두근거려. 시대에서 오는 동질감이란 게 있는 걸까. 미술과 음악이라는 장르에 관계없이 내가 좋아하는 풍의 예술을 했던 이들은 어떤 대화를 했을까 궁금해지거든.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주인공과 마주쳤던 파리 여성이 이전 시대에 남겠다고 하는 마음이 이해가 가지. 나는 내 인생을 살며 화가의 인생을 같이 느끼고 싶지만 말이야. 첫 번째 이야기는 여기에서 마칠게. 그럼 다음 주에 또 만나!


당신은 어떤 화가의 작품을 좋아하나요?



매주 수요일 다음 편 예고

디즈니 100주년의 시작점, 스노우 화이트- 거울아 거울아, 백설공주에 숨겨진 비밀스런 심리학 이야기는 뭐니? 게다가 표절 의혹까지?! 과연 어떤 이야기일지 다음 주에 만나.




무조건 당신만 모르는 명작의 덕질 노트


사전트의 최애 예술가 친구, 클로드 모네 (Claude Monet, 1840~1926) 

    사전트는 모네의 그림을 그려줄 정도로 그의 가족들과도 친분이 있었고, 로뎅과 저녁 식사를 했으며 동시대 음악가인 바그너의 열렬한 팬이었습니다. 당시 예술계의 전통은 친구 및 동료 예술가들의 스케치를 선물로 선물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모네를 그린 이 그림만은 사전트가 평생  간직하였고 사전트가 수집한 모네의 여러 작품들과 함께 그의 스튜디오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는 사전트가 모네를 얼마나 존경하고 애정했는지를 나타냅니다. 사전트에게는 동경하던 모네와 교류하였던 그 평화로운 시절이 그가 죽을 때까지 기억하고 싶은 의미있는 순간이었나 봅니다. 사전트는 본인의 가정을 만들지 못했기에 모네 가족과의 시간이 그에게 더 특별한 행복을 가져다 준 것 아니었을까요?


John Singer Sargent's Claude Monet Painting by the Edge of a Wood (1885)


참고문헌

Davis, Deborah. Strapless: John Singer Sargent and the fall of Madame X. Penguin, 2004.

Fisher, Paul. The Grand Affair: John Singer Sargent in His World. Farrar, Straus and Giroux, 2022.

https://www.metmuseum.org/art/collection/search/21382

https://www.metmuseum.org/art/collection/search/21387

https://www.gailbrinsonivey.com/portrait-of-madame-x/

https://thearkofgrace.com/2016/02/19/madame-gautreau-1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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