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왕 루이14세가 문화와 예술의 나라의 기틀을 세웠다고?
80년대 후반, 세계 여행 자유화 그리고 2002년 한, 일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개최한 이후부터 한국인들의 세계여행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그런 현상이 없어졌지만 과거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던 시절에는 여성들을 중심으로 문화와 예술의 나라라는 이미지가 매우 강했던 프랑스의 인기가 특히 높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당시에는 많은 한국여성들이 최고로 선망하던 나라가 프랑스였고 특히 프랑스와 파리는 ‘문화와 예술의 나라‘ 혹은 ’문화와 예술의 도시‘라는 인식이 팽배했었던 것이다. 그래서 한때 한국여성들이 가장 가고 싶은 나라를 꼽으면 항상 프랑스가 1위를 하던 그런 시절이 분명히 있었다. 아마도 40대 혹은 50대 이상의 한국 사람들, 특히 여성들이라면 이 말에 충분히 공감하고 인정 할 것이다.
그렇다면 프랑스와 파리는 어떻게 해서 ‘문화와 예술의 나라’ 혹은 ‘문화와 예술의 도시’라는 명성을 얻을 수 있었을까? 한 나라의 문화와 예술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조건이 선행되어야 하는 데 바로 그러한 문화와 예술을 창작하고 선도하는 사람들, 그중에서도 화가들을 중심으로 한 예술가들이 당연히 많아야 한다는 것이다. 프랑스와 파리가 문화와 예술의 나라 혹은 낭만의 도시로서의 명성을 떨쳤다면 당연히 많은 예술가들이 파리를 비롯한 프랑스에 몰려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모여든 예술가들이 수많은 명작과 예술품들을 만들어내고 그런 예술품들을 향유하려는 많은 사람들이 생겨나면서 어느 새 도시는 활력을 갖게 되고 문화와 예술이 풍부한 장소가 됐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파리와 프랑스가 문화와 예술의 도시나 문화와 예술의 나라가 됐을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 피렌체를 중심으로 한 이탈리아에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 등 위대한 예술가들이 등장하면서 15~16세기 르네상스를 맞이하게 되었고 피렌체와 이탈리아로 많은 예술가들이 몰려들면서 이탈리아가 전 세계 문화와 예술을 선도했었던 걸 분명히 기억한다. 그렇다면 프랑스의 경우는 어떠할까? 언제부터 프랑스와 파리에 많은 예술가들이 몰려들었고, 무슨 이유로 유럽에 있는 예술가들이 이탈리아와 피렌체가 아닌 파리와 프랑스로 몰려들었을까? 또한 프랑스는 유럽의 많은 위대한 예술가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서 국가적으로 어떤 정책들을 펼쳤을까?
15~16세기는 문화와 예술을 통해 르네상스를 주도했던 피렌체와 이탈리아가 문화와 예술의 선진국이자 중심 국가였다면 17세기 들어서면서 이런 현상에 서서히 변화가 오기 시작한다. 즉 피렌체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형성됐던 문화와 예술에 대한 헤게모니가 17세기부터 파리와 프랑스로 이동했던 것이다. 물론 그러한 변화의 바탕에는 정치적인 요인이 분명히 있었다. ‘태양왕’이라고 불렸던 루이14세가 프랑스를 통치하게 되면서 강력한 절대왕정을 펼쳤고 이를 통해서 프랑스는 서서히 유럽의 중심국가로 변모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루이14세가 통치하던 시절에 프랑스는 자국 역사상 가장 찬란한 문화와 예술의 전성기를 보내게 됐던 것이다.
프랑스 국민들은 단독으로 친정 체제를 구축해서 강력한 권한을 행세하는 루이14세를 인정하고 그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기에 이른다. 국민의 강력한 지지를 등에 업은 루이14세에게 더 이상의 걸림돌은 없었다. 루이14세의 시대에는 정치, 경제를 비롯, 문화와 예술까지 모든 것이 위대한 시기였고 특히 국왕 자신이 가장 위대한 존재였다. “그의 치하에서는 모든 것이 평온했다.”는 18세기 프랑스의 위대한 지성이었던 볼테르의 말이 루이 14세 당시 프랑스의 상황을 압축해서 증언한다.
그렇다면 정치적으로 안정된 절대왕정을 통해 마치 강력한 독재자와도 같았던 루이14세와 프랑스는 어떻게 문화와 예술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일까? 루브르궁에서 베르사유 궁으로 옮긴 루이14세는 완전히 정국을 장악하기 위해서 주로 하류계급에서 인재를 등용하는 방식을 썼으며 약 54년에 이르는 친정기간에 겨우 17명만을 장관에 임명할 정도로 엄청나게 폐쇄적인 정치를 했다. 그러나 이처럼 정치적으로는 독재자와도 같았던 루이14세였지만 그에게는 뜻밖에도 엄청난 반전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엄청난 반전은 바로 정치적으로는 무시무시한 루이14세가 뜻밖에도 문화와 예술을 너무나 좋아하던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예술 활동을 얼마나 좋아했으면 최고 권력자가 밤마다 많은 예술가들이나 연극, 발레 등을 하는 사람들을 궁궐로 불러들였고 루이14세 자신이 직접 배우가 돼서 무대에 서는 일도 많았을 정도였다. 루이14세는 예술 중에서도 특히 춤(발레)을 가장 좋아했고 발레복을 입고 발레리노가 돼서 무대에서 멋진 발레를 선보이는 일을 좋아했었다.
정치적으로는 그 어떤 정적이나 라이벌도 허용하지 않았고 자신에게 도전할만한 힘이 있는 귀족세력들을 철저하게 억누르면서 절대왕정을 펼치던 냉철한 독재자 루이14세가 몸에 찰싹 달라붙는 일명 쫄쫄이 바지 같은 발레복을 입고 우아하게 무대를 장악하면서 공연을 하는 모습이 연상되는가.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절대자, 독재자의 그런 모습을 머릿속에 쉽게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 서양 역사적으로도 절대자나 강력한 독재자가 발레복을 입고 발레를 하는 것을 별로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쫄쫄이 바지를 입고 굽 높은 신발을 착용한 채 무대를 돌아다니면서 발레를 추던 루이14세의 모습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에게 따라다니는 ‘태양왕’이라는 호칭도 바로 발레 공연에서 그가 멋지게 분장한 모습을 보면서 만들어 낸 용어였던 것이다.
5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국왕이 된 루이14세는 그의 나이 15세였던 1653년, <Ballet de la nuit, 밤의 발레>라는 작품에서 태양 역할을 맡게 된다. 자신의 역할에 걸맞게 태양처럼 멋지게 분장하고 의상을 입은 루이14세의 모습에 관객들은 큰 충격을 받았고 이어서 그를 향한 많은 지지와 찬사를 보냈던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루이14세의 권력은 점점 더 공고해 질 수 있었던 것이다. 루이14세가 유행시킨 발레를 비롯한 많은 예술에 빠져든 정치인들과 귀족들은 정치에 대한 관심을 줄이고 예술에 대한 관심을 키우게 됐고 이것은 결론적으로 루이14세에게는 정치적인 이득이었던 것이다.
정치적 독재자 이미지의 루이14세와 문화예술을 즐기는 루이14세는 선뜻 어울리지 않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는 누구보다도 문화와 예술을 사랑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프랑스가 문화와 예술의 나라가 될 수 있었던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은 누가 뭐래도 국왕이었던 태양왕 루이14세였던 것이다. 이러한 루이14세의 적극적인 문화 후원에 힘입어 프랑스의 고전문학은 활짝 꽃을 피우게 됐고 그의 궁정 생활은 유럽 다른 군주들과 문인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었으며 프랑스어는 유럽의 사교계와 외교계를 대표하는 언어가 되게 됐던 것이다. 이러한 루이 14세의 문화예술 적극 지지에 힘입어 프랑스 전 지역은 물론이고 유럽 전역에 있던 훌륭한 예술가들이 너도나도 파리와 프랑스로 몰려들었고, 이들을 통해서 파리와 프랑스는 문화와 예술의 도시 그리고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나라가 됐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