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 시간을 지나선지 역이 한산하다. 벽에 등을 기대고 의자에 앉아 지하철을 기다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덩치에 비해 조용히 차가 서고 내리는 사람 없는 지하철에 올라 내 자리를 찾아간다. 서울에서 그리 먼 곳이 아니지만 빈자리가 드문드문 보인다. 그래도 젊은이 하나가 내 자리 옆 칸막이에 엉덩이를 대고 폰을 보고 있다. 양손 엄지가 바쁘다. 흔들리는 차 속에서 재주도 좋다. 주위를 살피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폰에 코를 박고 있다. 내 폰도 신호를 보낸다. 카톡! 그 녀석이다. 간단히 용건만.
"오나?" "지금 가고 있다. 지하철 안이다." "미수역 3번 출구다." "알았다."
나는 지공선사다. 당연히 내 자리는 경로 우대석. 은퇴 후의 삶이니 딱히 외출할 일도 없지만 오늘처럼 지하철을 이용할 때는 내 자리 외에는 앉지를 않는다. 나는 백수니까. 교통카드 담당 아가씨의 말.
"조금도 달리 생각 마십시오. 어르신들 덕에 우리가 이렇게 살 수 있습니다."
그 말에 영혼이 담겼던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 세대에게 우리 삶을 이해하라는 말이 무리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안다. 세상은 무섭게 변하고 있다. 느낌에는 조선 왕조 500년 보다 서울 근교로 이사 온 지금 3년의 변화가 더 크다.
군대 생활 힘들어하는 아들 녀석에게 한 마디.
"18개월도 못 버티나?"
"짧은 생활이니 아빠 한 번 더 해 볼래요?"
바로 꼬리를 내렸다. 우리는 두 배 가까운 세월을 울었다. 전방의 겨울바람은 왜 그리도 차던지! 삶이란 돌아갈 수도 건너뛸 수도 내릴 수도 없는 직진 운항이다. 모두 자신의 현재를 살 뿐이다. 볼 것 하나 없는 지하철 안에서도 시간은 흐르고 있다.
녀석을 만난 것은 가슴에 이름표를 달고 모이는 재경 고교 동기회에서였다. 지금은 밀려났지만 당시엔 우리나라 3대 도시였던 대구에서 학교를 마치고 시골에서 직장 생활. 지금 보다 교통이 불편했던 당시에는 대구 동기회에도 참석하지 못하는 시골 생활이었다. 당연히 서울 동기회는 처음이다. 졸업 후 40년의 세월. 아는 얼굴을 찾아 두리번거리는데 이름표를 보며 녀석이 먼저 아는 체를 했다. "우리 언제 한 반 했다." 명찰과 얼굴을 번갈아 보니 옛 얼굴이 남아 있다. "맞다! 니 3학년 때 우리 반이었다." 그런 사이였다. 졸업 후 40년 만의 만남. 학창 시절에도 키 차이가 많이 나서 그리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다. 그래도 낯선 서울서 만나는 아는 얼굴이라 반가웠다.
역시 서울은 다르다. 고급스러운 호텔을 빌린 동기회 행사. 끝날 무렵 연례행사로 sns에서 덕담을 주고받던 친구가 내 자리로 왔다. "술 해도 되나? 나가자. 멀리서 왔는데 한 잔 해야지." 녀석도 따라 일어선다. 다른 친구들과는 약간은 겉도는 느낌이다.
술잔을 건네며 친구가 한 마디. "기차로 가나?" "지하철 있다."
"이사 왔나?" "아들 때문에 큰 맘 묻다." "어데?" "바로 옆이다."
손을 꼭 잡는다. "잘했다. 서울 와야 댄다. 얼빵한기 그래도 실속은 챙기네."
손의 온기에 친구의 진심이 느껴진다. "내가 살라 캤는데 니가 신고식해라."
녀석이 끼어든다. "내가 환영식 한다. 신고는 다음에 해라."
기어코 녀석이 2차를 계산했다. 금수저였던 녀석답다고 생각하는데 헤어질 때 신고식 하라던 친구가 한 마디 한다. "조심해라. 옛날 생각하면 안 된다." 그러고 보니 녀석의 말에서 가장 고치기 어렵다는 경상도 사투리가 많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