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안에서 잠시 잠깐 보이던 하늘이 사라졌다. 주위를 살피니 서 있는 사람들도 꽤 된다. 약간은 답답한 느낌. 퇴직 후에 찾아온 눈 떠도 갈 곳 없어진 허전함과는 또 다르던 답답함과 같은 느낌이다. 지금 생각하면 고생만 시킨 아내에 대한 미안함에 묵직하던 느낌이 이 답답함과 같은 게 아닌가 생각한다.
"옆동의 의사 딸은 필리핀으로 유학 갔단다."
"중학생이 뭔 유학? 돈이 썩었구나."
"애가 좀 별나긴 별나다더라." "욕심은...."
"서울 임실이 애는 학원만 네 개 다닌다더라."
"말에 물을 먹일 수는 없다 안 카더나. 지가 해야지."
"또 그 소리! 내일 차는 내가 쓴다. 교육청에 영재 교육 가야 댄다. 남들은 유학도 보내는데 교육청이라도 보내야지." 그 시절 남자들은 그래도 살만했다. 돈 몇 푼 번다고 집안일은 모두 아내 몫이었다. 산업화 사회에서 약간은 소외당한다는 생각이 들던 시골 생활. 정말 푼돈 같던 봉급.
밤늦은 퇴근 시간. "안 나가나?"
사무실에서 기웃기웃. 술이나 한 잔 하잔 말이다.
"휴일이라고 집에서 빈둥빈둥. 집 지키는 셰퍼드냐?"
친한 척하는 직장 상사의 뼈 있는 농담이다. 일에 치이고 스트레스는 퇴근 후의 술 한 잔에!
우리를 흔히 산업화 세대라 말한다. 산업화 역군. 말은 그럴듯하다..
교통 카드 발급받으며 듣는 말. "한강의 기적을 이룬 세대. "
그건 그냥 교육받은 말이라 생각한다. 영혼 무.
나는 생각한다. 누가 뭐래도 한강의 기적은 어느 한 사람의 힘이 아니라 OECD가 무엇인지도 몰랐던 근로자들의 피와 땀의 결실이다.
우리 어머니도 내게 필요 이상의 사랑을 쏟으셨다. 짜증 날 정도의 간섭. 그것이 어머니에겐 사랑이었다.
내 아내도 마찬가지. 경제적으로 무능한 남편에게 기대할 수 없는 희망을 자식들에게 바란 것이 아닌가 생각. 시골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우월한 집단이 의사였다. 당연히 아내의 바람도 늦둥이 의사 되는 것이었다. 학원 대신 교육청에서 실시하던 영재 교육. 당연히 수학반과 과학반. 아내는 그런 정보는 바싹했다.
덕분에 시골 사는 우리 애들 의대는 못 갔지만 모두 서울 소재 대학 다녔다. 당시의 유행어!
대한민국에 대학 세개댜. 서울대. 서울 약대. 서울 상대.
서울 있는 대학, 서울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 대학. 서울에서 상당히 멀리 있는 대학.
결혼 전 직장 생활 경험이 있는 아내의 푸념. "돈 버는 일이 젤 쉽다."
남편 노릇하기 참 쉬웠다. 지금은 아내 말이 말씀이다. 여기의 말씀은 높임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