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리웠던 한국, 살 떨렸던 비자 인터뷰
지난번 글에서 다뤘던 업무 평가가 끝나고 또다시 회사와 집을 넘나드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초심으로 돌아가 열심히 일해야지 라는 다짐을 매일매일 다잡으며 일을 했던 것 같다.
여름의 끝이 눈에 보이고 뉴욕의 날씨가 점점 서늘해질 무렵, 나는 몇 달 전 끊어놓았던 한국행 비행기표를 발권했다. 무려 2주나 (돌아와서 보니 너무나도 짧은 2주였지만) 자리를 비우는 휴가였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이토록 오래 자리를 비웠던 건 처음이라 몇 달 전부터 보스에게 미리 알리고, 그전에 맡은 프로젝트들을 마무리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무려 2년 만에 방문하는 한국이었다. 한국을 방문하는 이유는 우선 크게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형제의 결혼식이 있었고, 둘째는 올해 초, 이직을 하면서 새로 받은 비자를 여권에 발급받기 위함이었다. 여권에 비자를 발급받기 전이라 그동안 해외여행도 한번 못 가고, 한국에는 더더욱 갈 기회가 없었다. 그동안 미국에 묶여 지내면서 얼마나 답답했던지 서러울 지경이었다. 가족들과 친구들의 얼굴이 무척이나 그리웠다.
한국에 가기 전 날, 맡은 프로젝트의 마무리가 생각보다 오래 걸려 퇴근이 늦어질까 조마조마했다. 짐을 다 싸지도 못했는데 행여라도 밤 비행기를 놓칠까 봐 얼마나 발을 동동 굴렀던지. 미국이 나를 놔주지 않는 느낌이었다.
집에 도착해서 옷가지들을 캐리어에 던져 넣고 공항으로 가는 택시를 잡았다. 회사에서 업무에 관련해 급한 이메일이 올까 (물론 부재 시 연락망을 돌려놓았지만) 혹시라도 빠뜨린 짐이 있나 온통 신경을 곤두세우며 비행기에 올라탔다. 좌석에 털썩 주저앉자마자 무거운 피로감이 몰려왔고, 기내식도 놓칠 만큼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새벽에 도착한 인천공항 터미널은 적막했다. 졸린 눈을 치켜뜨고 바삐 발걸음을 옮기는 승객들 틈 사이에서 나는 그리웠던 한국의 냄새를 맡으며 울컥했다. 한국어로 된 안내 간판이 얼마나 반가웠던지, 그동안의 긴장의 끈이 스르륵 풀리는 기분이었다. 아, 집이다!!
전원을 꺼두었던 핸드폰을 켰다. 상사에게서 이메일이 와있었다.
'프로젝트 때문에 그동안 고생했지? 한국에 잘 다녀오라는 인사도 제대로 못했네. 푹 쉬고 돌아와! (웃는 이모티콘)' 감동의 쓰나미가 몰려왔다. 뉴욕에 돌아가게 되면 더 열심히 일할게요,라고 회사의 도비는 다짐했다.
제 아무리 회사 생활이 힘들어도 월급이 들어올 때와 상사의 격려가 날 춤추게 한다.
새벽이라 집까지 가는 교통편이 마땅치 않아 딸을 직접 데리러 와주신 부모님은 2년 사이에 많이 나이가 들어계셨다. 엄마의 품에 와락 안기는데 내가 안기는 것이 아니라 엄마가 내 품에 안기는 느낌이었다. 아빠의 희끗희끗한 흰머리도 눈에 들어왔다. 재잘재잘 한국에 있으면서 먹고 싶은 엄마의 집밥을 주르륵 나열하면서 나는 어릴 때의 철부지 딸로 돌아갔다. 집에 온 게 눈물이 날 정도로 너무 좋았다.
집에 들어서면서 예전이랑 변한 게 없는 내 방의 모습에 편안함을 느꼈다. 뉴욕에 있는 내 집, 내 방에서도 느꼈던 위화감과 불편함은 내가 타지에서의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계속 알려주는 듯했다면, 한국 본가에서의 내 방은 '어서 와, 그동안 고생 많았지?'라고 말하며 감싸주는 엄마의 품과 같았다. 6년간의 해외 생활로 꽤 단련되었다고 생각한 내 멘탈은 집에 오니 그동안 내가 얼마나 한국을 그리워했는지 감성에 젖게 만들었다.
아빠가 만들어주신 아침을 배부르게 먹으면서 가족들과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동안 전화통화로 띄엄띄엄 주고받았던 소식과 안부는 직접 얼굴을 보고하는 대화에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삭막하고 짧았었다.
문득 내가 성공하겠다고 건너간 뉴욕 생활에 대한 대가가 가족들과 보낼 수 있는 시간과 추억이었나 라는 생각도 들었다. 집구석구석에 엄마가 액자에 끼워둔 나와 언니의 사진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에는 예쁘게 나오지도 않은 내 사진을 왜 다 보이게 걸어뒀나 짜증도 냈는데, 문득 타지에 있는 두 딸의 얼굴을 이렇게라도 보려는 부모님의 그리움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른이 되고 나니 엄마 아빠가 더 이해가 가는 순간이었다.
시간이 금이라고, 2주 동안 한국에 있으면서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제일 중요한 미 대사관에서의 비자 발급 인터뷰에서부터, 언니의 결혼식, 건강검진 등등, 중요한 일정 사이사이에 최대한 한국의 친구들을 많이 보고 가고 싶어서 머리에 쥐가 나도록 스케줄을 짰던 것 같다. 우선, 스트레스 때문에 축났던 몸도 돌볼 겸 병원에 연락해 건강 검진 예약을 하고, 당장 며칠 뒤 대사관 비자 인터뷰에 집중하기로 했다.
비자 인터뷰 날은 비가 많이 왔다. 그리고 사건 사고가 많아 하마터면 비자를 발급받지 못할 뻔했었다. 예약한 인터뷰 시간에 맞춰 도착한 미국 대사관은 파이프가 터졌는지 인터뷰를 하는 면접관 실이 온통 물바다였다. 한편에는 공사 인부들이 바쁘게 움직이면서 바닥을 닦고 있었고, 다른 한 켠에서는 대 여섯 명의 면접관들이 무서운 표정으로 면접을 보고 있었다. 시작부터 예감이 안 좋더라니, 면접에 필요한 중요한 서류 하나가 시스템에서 누락이 되었다고 해서 대사관 밖으로 뛰어나가 한 인쇄소 사장님의 컴퓨터를 빌려야 했다. 쪼그려 앉아서 서류를 다시 출력하는데 혹시라도 인터뷰 시간을 놓칠까 봐 울먹거리며 발을 동동거렸다. 등에서 식은땀이 주룩 흐르는 느낌이 났다.
서류를 뽑고 다시 도착한 면접장은 분위기가 많이 안 좋았다. 학생 비자를 받기 위해 중학생 뻘 정도 되는 나이의 한 남자애와 함께 온 어머니는 열심히 비자 인터뷰를 위해 일목요연하게 서류를 백과사전 두께의 바인더에 정리해 오셔서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미국의 한 에너지 발전 연구소에서 일할 예정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어떤 남자분은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면접관에게 자신의 이력을 설명하고 계셨는데, 매의 눈으로 서류를 읽어 내려가던 면접관은 차가운 얼굴로 계속된 질문공세를 퍼붓고 있었다. 그리고서는 면접의 막바지가 되자 그 면접관은 그 두 면접자에게 합격 도장 대신 '보류'라는 결과를 통보하는 것이 아닌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대기실 의자에 앉아있는 그 두 면접자들과 함께 그 날 추풍낙엽처럼 불합격 통보를 받은 면접자들이 생겨났다.
미국에서 이민자 / 비이민자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다시 한번 느끼는 순간이었다. 한 뉴스에 따르면 미 대사관이 한국 지사에 있는 이민 비 자국을 철수하고 괌으로 옮긴다고 해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미국에서 일할 수 있는 취업 비자를 받고서도 정작 여권에 도장을 받기 위해 한국에 와서 미 대사관 인터뷰에서 불합격 통보를 받은 주변 몇몇 지인들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제 아무리 열심히 준비했다고 해도, 면접관의 재량에 따라 결과가 나뉘는 것이었다.
"다음 면접자 분, 나오세요!"
내 차례가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