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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혜를 빛내 Mar 05. 2021

시작과 과정, 그리고 결과에 대해서.

바이올린과 부대찌개가 생각나는 밤.

시작하는 것은 쉽다. 중간에 그만두는 것은 더 쉽다. 

중간에 그만둔 일을 다시 재개하는 것은 무척 어렵다. 

끝까지 밀고 나가 결과를 도출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열심히 했던 바이올린이 있다. 

사촌언니가 물려준 바이올린인데, 스트라디바리우스같이 대단한 브랜드의 악기가 아님에도 아직까지 튼튼한 걸 보면 장인이 좋은 나무로 정성 들여 짠 것이 느껴진다. 소리도 퍽 근사하다. 특히 비브라토를 할 때 나무가 내는 울림이 묵직하다. 잘하지는 못하는데도 가끔 머리를 맑게 하고 싶거나 일을 하는 도중에 쉬고 싶으면 바이올린을 켠다. 7살 때 엄마 손에 붙들려 따라가서 배우게 된 바이올린이 예전에는 억지로 하는 것으로 느껴져 쳐다보기도 싫었는데 (그때도 지금도 나는 누군가가 억지로 시키거나 강요하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하는 고집스러운 면이 있다), 그동안 방 한 구석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먼지가 쌓이고 잊힌 내 바이올린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 정도이다. 나이가 들어보니 내가 한 가지 악기라도 다룰 줄 안다는 사실이 지금은 무척 감사하게 느껴진다. 주변을 둘러보면 음악가가 아님에도 취미로 드럼을 치거나 색소폰을 불 줄 아는, 그런 지인들을 보면 바쁜 와중에도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즐길 줄 아는 멋진 모습이 보기 좋다. 그들의 삶은 색깔로 가득 차 반짝반짝 빛난다. 

아직은 주춤거리며 연주하고 있는 실력이지만, 나는 바이올린을 다시 시작했다. 음악은 듣는 것뿐만이 아니라 내가 직접 악기를 들고 소리를 내는 행위에서도 즐거움과 치유의 힘이 있다는 걸, 나는 이제야 깨달았다.


작년 3월, 코로나 19로 인해 소란스럽고 혼란한 시기에 나는 재택근무를 시작한 것에 대해 글을 쓴 것을 마지막으로 브런치와 잠시 거리를 둔 적이 있다. 내 부족한 글을 읽으시는 지인 분들과 구독자분들께서 왜 요즘 브런치에 새로운 글이 올라오지 않는지에 대해 여쭤보셨는데, 난 그때마다 무슨 주제로 글을 써야 할지 고민 중이라고 둘러댔던 것 같다.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새로움 없는 일상 속에서 나는 쳇바퀴를 굴리는 햄스터가 된 것처럼 느껴져 무기력함도 느끼고 방황도 했다. 일상에 자극이 없으니 둔감해진 기분이랄까. 당연히 펜도 손에 안 잡혔다. 이것이 뉴스에서 말하는 코로나 블루였던 것일까? 집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는 동안 참 많은 고민과 생각을 했다. 뉴욕에 사는 것이 맞는 걸까라는 고민에서부터 나의 일, 진로에 대해서, 그리고 나의 미래에 대해서. 그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질문은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였다. 사실 거창한 답을 기대한 독자가 있다면 미리 기대감을 낮추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하하. 난 대단한 것을 목표로 접근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혼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나 자신에 대해 뒤돌아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나의 성향, 호불호, 고쳐야 할 버릇, 들여야 할 습관. 단편적으로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은 많았지만 심도 있게 접근하고 싶었다. 위의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나는 예전부터 '나누는 사람이 되고 싶다'라고 답했었다. 


그 이유인즉슨 아마 고등학생 때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을까 싶다. 

한국에서 고3 수험 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다. 우리 학교는 경기도 외곽에 있는 산 중턱에 있는 기숙사 학교였는데, 밖에서 음식을 사 갖고 오지 못하게 되어있어 학생들은 종종 기숙사 사감 선생님 몰래 치킨이나 외부 음식을 반입해 주말에 먹고는 했었다. 하지만 기숙사 복도 구석구석마다 CCTV가 설치되어있어 금세 들통나곤 했고, 벌점을 받고 슬퍼했었던 기억이 많다. 우리 학교 앞에는 유명한 부대찌개 집이 하나 있었는데, 하루는 우리 반 학생들과 스스럼없이 지내는 국사 선생님이 금요일 오후에 우리를 데리고 나가 부대찌개를 사주셨었다. 뜨끈하고 얼큰한 부대찌개 국물이 아직도 기억에 선하다. 부대찌개를 먹으며 선생님께 "쌤, 우리가 나중에 크면 선생님께 꼭 밥 사드릴게요."라고 말씀드렸었는데, 선생님은 그 얘기를 들으시더니 웃으시면서 "얘, 너네가 왜 나한테 밥을 사주니, 내가 제자들한테 사주는 게 맞지."라고 말씀하셨다.
그때 선생님이 사주신 부대찌개는 눈물 날 정도로 맛있었다.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국사 시간이 되었는데 선생님은 그 날 출근하지 않으셨다. 다들 무슨 일인지 궁금해했지만 아무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화요일 날 생물 시간에 수업을 듣고 있는데 갑자기 담임 선생님께서 수업 중에 들어오시더니 국사 선생님의 부고를 전하셨다. 심장마비라고 했다. 머리가 띵했다. 분명 금요일까지 우리와 함께 부대찌개를 드시던 선생님이었는데 돌아가셨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혼자 사시기 때문에 발견도 늦었다고 했다. 

그 날 저녁 다 같이 선생님이 계시는 장례식장으로 가서 두 번 절을 했다. 우리를 보시고 선생님의 친누나께서 와줘서 고맙다고 연신 말씀하시면서 우시던 게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때 이후로 나는 학교 앞 부대찌개 집에 가지 못했다. 


내가 나누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이 든 이유는, 다른 누군가에게도 내가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한 끼 식사를 사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이다. 나누는 것이 밥이든, 위로나 격려의 대화든, 유익한 정보든, 생각이든, 뭐든지 간에 나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그것으로 내 주변이 더 나아진다면 참 보람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브런치를 통해서 내가 알고 있는 것, 내 생각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게 된 것도 그중에 하나였다. 그렇다면 나누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내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생각이 미쳤을 즈음, 나는 브런치에 글을 쓰는 활동을 차마 이어가지 못했다. 문득 내가 쓰는 글이 깊이가 없다고 느껴져 부끄러워졌고, 내가 좀 더 글을 유려하게 쓰면 좋을 텐데 라는 생각에 더 쓰지 못했었던 것 같다. 누군가는 내게 "일단 써봐, 그래야 실력이든 자신감이든 늘게 돼."라고 말했었다. '네, 말은 쉽죠...'라고 속으로 되뇌었다. 그래, 운동도 계속해야 몸에 근육이 붙고 결과가 눈에 보이게 되는데 난 참 끈기가 없구나,라고 그때 느끼고 낯뜨거웠다. 인정하면 그만인 것을. 바이올린도 다시 손에 쥐었는데 펜도 다시 잡으면 되는 것을. 
내가 나누려고 하는 글의 본질이 무엇인지, 나는 아직도 탐구 중이다. 내가 느낀 바를 스쳐 지나가게 내버려 두지 말고 그것이 뭐든 일단 적어 내려 가는 '배설의 행위'를 계속해서 해나가다 보면 찾게 되지 않을까. 본질이라는 진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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