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 한달살이 Day 17
어젯밤 딸이 잠든 후 스마트폰으로 오늘 뭐할지를 검색하다 잘 타이밍을 놓쳐 오랜만에 맥주 한 캔과 프링글스를 들고 테라스로 나가 예전에 즐겨봤던 캐.드(캐나다 드라마)의 새로운 시즌을 보다 새벽 2시에 침대에 다시 누웠다. 한국에서 학기 중(7:40)보다 요즘(7:10)에 더 일찍 일어나는 상황이다 보니 아침부터 피곤이 몰려왔다. 그래서 아이를 체크인시키고 조식당에서 제공하는 뜨아와 아아를 두 잔 연속으로 마셨는데도 정신이 들지 않았다.
커피를 마시는 동안 나 포함 3명이서 오늘 뭐할지를 함께 고민했지만, 어쩐지 쉽게 의견이 모아지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무의미한 대화를 한 시간 가까이 주고받다 각자 흩어졌다. 어젯밤에 한국에 물난리가 났다는 소식으로 카톡창이 시끄러웠는데 오늘은 이곳도 아침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비가 내려서였을까, 어제 잠을 좀 적게 자서였을까, 다른 엄마들과 의견이 모아지지 않아서였을까, 룸에 들어오니 갑자기 만사가 귀찮아졌다.
피곤하긴 한데 그렇다고 오전 10시도 안 된 시각에 잠이 들 것 같지도 않아 노트북을 켜고 취미생활을 시작했다. 엑셀을 열고 16일 동안 이곳에서 쓴 지출내역을 정리하는 것. 한마디로 가계부 작성이다. 누군가에게는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으나 숫자를 정리(?)하는 작업은 나에게는 일종의 취미생활이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숫자 나아가 수학의 세계에서는 나 자신이 좀 편안해지는 느낌이랄까. 아무튼 16일 동안 지출 내역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크게 많지 않아 기분이 좀 편안해진 그때 마사지를 받으러 나가는 엄마에게 비가 그쳤다는 연락을 받았다.
비가 그쳤다고? 그럼 나가야지! 평소보다 늦은 시각에 외출을 시작하는 것이었기에 멀리까지는 못 갈 것 같아 호텔 근처에 있는 나름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온다는 GWK 파크(Garuda Wisnu Kencana Cultural Park, 일명 가루다 공원)에 가보기로 했다. 한국 같았으면 걸어갈 거리였는데, 몇 번 말했다시피 이 동네는 잠깐이라도 걷기에는 여러모로 안 좋은 상황이라 택시를 불러 공원 안 셔틀버스를 타는 곳까지 들어갔다.
택시기사가 내려준 곳에서 언제 봐도 기분 좋아지는 빨간색 미니 셔틀을 타고 또 조금 더 들어가니 메인 입구가 나왔다. 그곳에서 EAT & TRIP 입장료(200,000 루피아)와 내부 셔틀 이용권(40,000 루피아)을 지불하고 또 셔틀을 탔다. 조금 비싸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점심값 포함이니까 그려려니 했다.
실제로 공원 내부는 걸어 다니기는 꽤 힘들 정도로 넓긴 했다. 처음 도착한 곳은 우리 호텔에서 항상 떡하니 보이는 아시아 최대 규모라는 GWK 동상 앞이었다. 뭐 인도네시아의 어떤 상징물인 거 같기는 한데, 솔직히 큰 관심도 감흥도 없었다. 다음 목적지는 Festival Park. 보아하니 이곳은 킥보드나 아이들 자동차를 빌려서 타는 넓은 공터 같은 곳. 그리고 그곳에서부터는 걸어서 이동을 하는 시스템이었다. 안에서 갈 수 있고 할 수 있는 것은 작은 박물관과 스타벅스, 푸드코트 그리고 전통 댄스를 보는 것이었다.
사실 내가 오늘 이곳을 왔던 이유 중의 하나는 호텔 근처의 가장 가까운 스타벅스가 여기였기 때문이다. 아침에 조식당에서 커피 두 잔을 마셨지만 내가 원하는 맛과 강도가 아니어서 스타벅스 커피가 땡겼고, 그냥 혼자 조용히 멍 때리며 있을 곳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외부를 조금 더 구경할지 스타벅스를 먼저 갈지 고민하던 차에 그친 줄 알았던 비가 또 내리기 시작해 바로 눈앞에 있는 스벅으로 들어갔다. 1시까지 노트북을 켜놓고 이것저것을 하다 박물관에 들어가 쓱 구경하고 나와 레스토랑을 찾아갔다.
솔직히 레스토랑의 첫 이미지는 우선 큰 공원 안에 있는 나름 큰 레스토랑인데 비해 그렇게 청결해 보이지가 않아 괜히 점심 포함 비싼 티켓을 끊었구나 후회가 될 정도였다. 하지만 역시 사람이든 장소든 첫인상이 다가 아니구나를 실감했다. 인도네시아의 제일 대표적인 음식인 미고랭을 시켰는데, 발리에 와서 먹었던 미고랭 중 제일 맛있었다. 강하지 않고 은은하게 매콤함이 느껴져서 더 입에 맞았던 거 같다.
그렇게 아이가 끝나기 전 혼자만의 발리 체험을 마치고, 오늘 Bali Bird Park(왕복 3시간 거리)에 다녀온 딸을 만났다. 좀 피곤해 보였지만, 4시부터 10시까지 또 뭘 하며 시간을 보내나 싶어 룸에 들어와 옷만 갈아입히고 바로 데리고 나왔다. 오후에 갈 곳은 울루와뚜 절벽사원. 울루와뚜 지역의 대표적인 관광지. 이곳에 처음 온 이후로 꼭 한번 가봐야지 했던 곳이다. 오늘은 일반적인 관광 코스를 체험하는 날.
택시로 30여 분을 간 그곳에는 역시나 예상대로 꽤나 많은 관광객들이 있었다. 사원(Temple)이어서 반바지나 짧은 치마를 입은 사람에게는 입구에서 보자기를 나눠주며 하체를 가리라고 하였다. 그래서 아까 딸에게 긴 바지를 입으라고 했으나, 위에 맞춰 입을 옷이 없다고 결국 반바지를 입고 나온 딸은 절벽사원에 있는 내내 그 긴 보자기를 불편해했다.
아무튼 여기도 또 입장료. 어른 50,000, 아동 30,000 루피아. 이런 입장료 내는 거 참 아까운데, 오늘은 입장료 지출의 날. 그래도 보라색 보자기를 두른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는 것을 보니 뭔가 관광하러 온 기분이 조금은 나서 들어가는 길이 살짝 설레었다. 6시에 시작하는 Kecak(케착) 댄스(일명 몽키댄스)를 보러 가는 사람들도 꽤나 많았다.
나나 딸이나 공연 보는 것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우리는 그냥 양쪽 절벽을 왔다 갔다 하며 풍경을 구경하고 사진을 찍었다. 늘 보는 바다와 하늘이기는 했지만, 절벽 위에서(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바다는 느낌이 조금 다르기는 했다. 구름이 많아서 아름다운 노을 사진을 남기지는 못할 것 같았고, 딸이 조금 지쳐하고 지겨워해 다른 사람들보다 일찍 내려왔다.
하지만 내려오기 전, 그리고 내려와서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각자 정말 큰일을 겪을 뻔했다. 울루와뚜 절벽사원을 다녀온 사람들의 후기를 보면 원숭이를 조심하라는 말이 많은데, 솔직히 나는 크게 귀담아듣지 않았었다. 그런데 맞은편 절벽 사진을 찍으려고 돌담 같은 곳에 몸을 가까이하고 폰을 들이대는 순간 원숭이가 내 아이폰을 확 채가려 했고, 어디서 그런 반사신경이 작용했는지, 그 순간 나 역시 내 폰을 꽉 붙잡아, 그 광경을 목격한 주변 사람들에게 약간의 환호를 받는 일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만약 거기서 내가 폰을 놓쳤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얼마 전에 아이가 모벤픽 리조트 로비에 폰을 두고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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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동안 혼비백산했던 일이 있었는데, 그 절벽에서 원숭이가 내 폰을 채어가 그것이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면, 그 뒤는 여러모로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나름 기억에 남을 그 명장면을 딸은 앞서 걸어가느라 못 봐서였을까. 원숭이들의 날렵함과 포악함에 대한 경계를 끝까지 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는지,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또 다른 원숭이가 이번에는 딸의 안경을 잡아채는 일이 벌어졌다. 분명 우리가 조금 전에 봤던 원숭이였는데(다른 원숭이에 비해 조금 뚱뚱해서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음), 어느새 살금살금 딸 뒤로 와서 안경을 낚아챈 것이다. 딸이 놀라는 소리에 나도 놀라는 한편 딸의 눈과도 같은 안경을 잃어버리면 또 어떻게 되나 싶은 마음에 꼭 안경을 찾아야 한다는 의지로 소리를 지르며 다가가자 그 원숭이는 나에게 누런 이를 드러내며 제법 위협을 가했다.
우리의 소동에 고맙게도 주변에 있던 현지인 아저씨 중 1명이 들고 있던 생수병을 원숭이에게 집어던지며 겁을 주니 안경테를 씹으려다 바닥에 내려놓고 원숭이가 도망을 갔고, 그 찰나에 나는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안경을 주워올렸다. 그러는 사이 어린 마음에 놀란 딸은 멍한 표정으로 안경을 받아 들었다.
그 후 곧 택시가 왔고, 딸은 택시에 타서도 “아직도 손이 벌벌 떨린다.” 며 놀란 가슴을 한동안 진정시키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럴 때 내가 더 호들갑 떨면 안 된다고 생각해, 원래 성향도 그렇지만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반응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나야말로 정말 가슴을 쓸어내렸다. 나의 폰과 딸의 안경. 오늘 정말 운이 나빠 그 두 가지를 모두 잃어버렸다면 남은 일정이 어떻게 되었을까. 뭐 또 어찌어찌 굴러가긴 하겠지만, 어쨌든 두 가지 모두 잘 지켜서 천만다행인 것은 분명하다.
물건을 사거나 새로운 장소를 갈 때 먼저 경험한 사람들의 후기를 잘 보는 편이 아닌데, 오늘 일을 겪고 나니 앞으로는 조금 더 꼼꼼하게 체크하고 미리 대비할 수 있으면 해야겠다는 생각이 조금은 든다. 입장료가 아깝지 않을 만큼 큰 교훈을 얻은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