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발로 걸어야 여행이지

발리 한달살이 Day 16

by 나우히어


Yoga class for parents


캠프 마지막 주 월요일이 시작되었다. 아이들은 오전에 미술활동이 있을 예정이었고, 나는 환전 신청을 한 후 요가 수업에 참여했다. 요가 수업이 끝난 후 한 엄마가 센스있게 선생님과 사진 한 장 찍자고 하여 평소에 수업하던 5층 식당 근처가 아니라 1층 수영장 근처 잔디에서 멋진 사진을 남기게 되었다.

발리에서 요가 수업을 할 때 제일 좋은 순간은, 한창 힘든 동작을 하느라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는 와중에 한줄기 시원한 바람이 불어올 때이다. 내가 한국에서도 실내 운동보다는 실외 운동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한데, 실외에서 운동을 해봐야만 조금 숨이 차거나 땀이 나더라도 곧 바람이든 그늘이든 나타나서 나의 힘듦을 상쇄시켜 줄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실내 운동이 수영장이라면 실외 운동은 바다와 같다고나 할까.


날것 그대로의 자연보다 사람이 만든 인공이 더 좋을 때가 있다.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있고, 깊이가 표시되어 있고, 강도를 예측할 수 있고, 갑자기 나를 찌르는 무엇을 만날 일이 없으니까.


예전에(2019년) 내가 썼던 시의 한 구절이다.

https://brunch.co.kr/@2gafour/27


어제 글 https://brunch.co.kr/@2gafour/141

에서 이제는 바다가 좋아 수영장이 좋아라고 물어보면 약간 고민이 될 것 같다고 한 것을 보니 그 사이 세상에 대한 나의 경험치가 아주 조금 더 올라간 것 같기도 하다.


Starbucks Reserve Dewata

아무튼 그래서 오늘은 인공과 자연을 적절히 섞은 믹스 앤 매치의 하루를 보내기로 했다. 자연을 제대로 느낀 요가 수업이 끝나자마자 옷만 갈아입고 택시를 불러 스미냑에 있는 아시아 최대 규모라는 스타벅스로 향했다. 11:30 즘 도착해서인지 아직 사람이 적어 1층과 2층을 오가며 사진을 찍고, 한국에서는 거의 시킬 일이 없는(시킬 수도 없는) 레몬 타르트와 아아를 시켜놓고 오늘 다 읽은 책의 구절을 블로그에 올리고 나니 어느새 사람들이 북적북적 좀 시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Bintang supermarket in Seminyak


오후 1시, 발리의 한낮은 열기와 소음과 매연 때문에 잠깐만 밖에 있는 것도 힘든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쾌적한 스타벅스에서 인공의 바람으로 충전을 했으니 다시 그 뜨거운 열기와 날카로운 소음과 매캐한 매연 속으로 나를 집어넣었다. 약 1km의 거리를 걸어 빈땅 슈퍼마켓으로 향했다. 빈땅 래들러 오렌지맛을 사기 위해.


어제저녁 인터넷을 보며 최근 빈땅 슈퍼마켓의 리뷰를 올린 사진과 영상에서 빈땅 오렌지의 흔적을 찾지 못했기에 오늘 아침, 출발하기 전에 전화로 물어볼까 잠깐 고민을 했었다. 하지만, 전화를 해서 물어보는 사전준비 따위 없이 무작정 슈퍼마켓으로 향했다.


실낱 같은 희망을 가져보았지만 역시나 빈땅 레드와 옐로우는 많은데 오렌지는 보이지 않았다.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약간의 기대 후 실망을 맛볼지라도 기대하는 그 순간은 또 행복하니까. 그래도 아이가 한국에서도 즐겨먹던 요뾰끼를 발견해 그것과 귤 비슷해 보이는 과일을 득템해 나름 수확이 있었던 빈땅 슈퍼마켓행이었다.


google map


다음 행선지는 다시 광활한 자연의 품으로. 한낮의 스미냑 거리를 걸어 걸어 더블식스 비치라는 곳으로 가보기로 했다. 나는 원래 길치, 방향치라 운전할 때도 무조건 네비에 의존하고 모르는 길을 혹시 걸어갈 때도 지도 앱을 켠 채로 가라는 길로만 간다. 한국에서는 거의 네이버 지도 앱을 애용하지만 여기는 외국이니까 구글맵을 켜고 빈땅 슈퍼마켓에서 더블식스 비치까지 경로를 검색해보니 거리는 약 1.1km. 못 걸을 거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슈퍼마켓을 나와 처음 방향을 어디로 잡을지가 문제였다. 괜히 헛걸음할까 싶어 슈퍼마켓 입구의 안전요원에서 물어보니 나가서 왼쪽으로 가면 된단다. 알려준 대로 가는데 내가 아까 스타벅스에서 슈퍼마켓으로 올 때 걸었던 길이다. 아무리 길치여도 그 정도 눈치는 있는데, 전체적인 경로에서 스타벅스에서 비치로 가는 길 사이에 슈퍼마켓이 있었기 때문에 아까 왔던 길로 가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순간적인 판단으로 방향을 잘못 알려준 안전요원을 속으로 욕하며 반대 방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street of seminyak

내가 택한 방향으로 걸어가다 보니 목적지까지의 거리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으로 나왔다. 그제야 안심을 하고 스미냑 골목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지난번 홀로 발랑안 비치를 갔을 때처럼 오늘도 한낮의 스미냑 거리에는 나 말고도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 가끔씩 보였지만, 동양인 여자 혼자 걷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 특별함을 스스로 만끽하며 오랜만에 내 두 발로 가고 싶은 곳을 가는 자유를 누리며 누구의 속도에 맞추지 않고 나의 속도로 걸어 다니니 ‘아 이래서 세상은 살아볼 만한 것이구나’ 싶었다.

며칠 전 스미냑을 다녀온 사람들에게 스미냑 비치를 가보고 정말 실망했다는 말을 들었던 터라 나는 그보다 조금 아래 위치한 더블식스 비치를 간 것이기는 한데, 글쎄 그들이 실망을 한 것은 그들의 기분 탓 아니었을까 싶기도 했다. 나는 오늘 스미냑 비치를 갔더라도 실망하지는 않았을 것 같긴 하지만, 뭐 내 눈으로 직접 본 것이 아니니 더 이상의 평가를 삼가는 걸로.


Doublesix beach in bali


어제도 보고 그제도 보고 요즘 하루가 멀다 하고 보고 있는 바다와 하늘이긴 한데, 한 번도 똑같은 모습인 적이 없다. 그래서 볼 때마다 새로운가 보다.


The sand beach in doublesix beach


모래사장 위에 무심히 놓여있는 형형색색의 빈백들이 더블식스 비치의 포인트였다. 오른쪽으로 계속 가다 보니 인터넷에서 봤던 익숙한 곳이 나타나 덥기도 하고 시간도 잠깐 비어서 자리를 잡고 빈땅 레몬과 나초칩을 시켰다. 아이가 끝나기 전까지는 돌아가야 해서 한 30분 앉아있었나. 그 30분의 시간을 내 머릿속에 마음속에 고이고이 담아두었다가 한국에 돌아가 문득문득 힘든 날 꺼내보기로 하고 언제나 아쉬운 혼자만의 시간을 종료했다.


돌아오며 아이 저녁으로 카레를 먹이면 될 것 같아 호텔 앞 음식점에서 밥만 1인분 사 왔는데, 수업이 끝난 아이가 급 같은 반 언니와 수영장에서 놀 거라고 해 예상치 못한 푸짐한 만찬을 즐기는 걸로 하루가 마무리되었다.



인생은 예측불가. 그래서 살아본 만한 것.


이런 문장을 분명 어느 책에서 보고 누군가에게 공유했던 기억이 나서 카톡과 블로그를 뒤적거려 보는데 찾아지지가 않는다.


오늘 서울에는 비가 정말 억수같이 쏟아졌나 보다. 주로 강남 위주로 물난리가 난 사진과 영상들이 카톡 대화창 여러 군데에서 전달되고 있다. 아무리 잘 사는 동네여도 하늘에 구멍이 뚫리면 그걸 막을 방법은 없나 보다. 그러니 오늘도 나는 자연의 위대함 앞에 한없이 작은 존재로서의 나를 그리고 타인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또 새로운 내일을 위해 잠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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